종교개혁과 설교
- 서창원 목사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대표, 삼양교회)
이끄는 말
16세기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시작된지 491년이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종교개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의 모토중 하나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루터라는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을지라도 유럽 대륙의 교회 개혁은 루터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쯔빙글리나 칼빈 및 낙스와 같은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개혁가들의 활발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 이후로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 및 대각성 운동의 주역들이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개혁교회의 틀을 다져왔다. 또한 프린스톤 신학교를 비롯하여 그래샴 메이첸 박사를 중심으로 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들과 후학들이 지금껏 개혁된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세속화된 교회,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질된 교회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곳곳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일군들의 수고와 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에 선한 열매들로 나타날 것이다.
필자는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여 갖는 본 세미나에서 종교개혁과 설교라는 주제를 살피면서 오늘 이 시대 여전히 필요한 교회 개혁과 올바른 설교사역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회개혁은 성경을 따라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
교회의 불완전함 때문만이 아니다. 교회는 구속함을 받은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늘 점검하고 확정짓는 작업이 필요하다. 실지로 성도들의 삶도 믿음 가운데 있는 것인지 확정하라는 교훈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교회인지, 그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인지, 믿음의 선진들이 물려준 유업을 잘 지켜나가고 있는지 수시로 살피지 않으면 세월의 변함에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여 종교개혁의 원리를 되새김질하며 우리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을 기준으로 개혁의 방향을 잡을 것인가? 세상의 문화인가?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인가? 교회는 국가나 교육기관과 달리 그 뿌리가 성경에 두고 있는 영적인 기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 자체를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이나 장식을 가리키지 않는다. 따라서 성도들이 모일 때만 사람의 눈에 띠일 뿐이지 흩어지면 세상에 사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삶에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답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 삶의 잣대나 지침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즉 기록된 말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다. 즉 성경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규범이며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뿌리인 것이다. 성경은 특히 여전히 불완전하고 죄의 오염에 쉽게 감염되는 교회의 기둥이요 터이다. 이렇게 구속함을 받은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교회 개혁은 계속 요구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진행될 사안인 것이다. 땅 위에 있는 어느 교회도 자신들이 목표점에 도달했다고 자신있게 선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날이 멀리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아닐지라도 완전한 것이 될 날은 매우 근접해 가고 있다. 오로지 천국에 있는 승리적인 교회만이 푯대에 도달했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교회 개혁의 과정을 보면 언제나 특출한 시대가 등장했었음을 본다. 즉 위대한 신경이 만들어진 시대라든지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등장하는 시기와 같은 때이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출발을 확고하게 다진 교회 개혁의 위대한 교리적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개혁의 완성은 아니었다. 적어도 역사가 흘러가면서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완전한 교회가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은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잡기 위해 푯대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교세 확장이나 기독교의 영향력 확보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내면의 영적 성숙을 향한 발돋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종교개혁은 교리적 차원의 개혁이라기보다는 제도적 개혁이 시급한 것처럼 말한다. 실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이후로 개혁교회가 따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낸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현대교회가 직면한 변화무쌍한 사회적, 환경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에 따른 올바른 지침이나 규율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적인 문제를 비롯한 예배와 교회 정치, 권징, 선교활동, 교육 기관, 출판 및 실천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교훈과 가르침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제공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세속적인 잣대의 대형화를 위한 목회성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성경적인 바른 교회상을 세상에 비추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기독교의 현실이다.
물론 종교개혁이란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 단계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의 교회 개혁 역시 순간에 다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히 진척시켜야 할 일이다. 열심있는 분들은 당장 첫 숟갈에 배부르고 싶어하지만 그럴수록 인내하며 마루 바닥을 머리로 헤딩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중세시대를 마감하고 개혁시대를 여셨듯이 지금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하여 작정하시고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면 세속화와 자유주의 신학에 병들어버린 교회를 단번에 수술하고 정상적인 교회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하나님은 진리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하나님의 소수의 일군들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위로부터 임하시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새 하늘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기까지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맞는 교회 개혁을 위한 몸부림은 계속해야 한다.
2. 한국교회의 현실적 진단
2005년도 통계청의 발표에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안이 벙벙했었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종교분포도를 통해서 나타난 결과 때문이었다. 지난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개신교 인구는 870만이 채 안되는 숫자였고 10년 전보다 되레 14만 4천명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천주교는 무려 75%가 성장하여 5백만명이 넘는 신도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불교 인구도 40만명이나 늘었는데 입만 열면 천 이백만 성도라고 떠들던 것이 9백만도 되지 않는 인구로 나왔으니 그 충격이야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본 원인들을 찾아 대책을 마련하고자 많은 논의와 분석이 따랐다. 대표적으로 1997년 발족한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이 2004년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분석에서 우선 꼽히는 것이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이미지라고 꼽았다. ‘교세 확장, 헌금 강요, 종교 지도자의 영적 자질, 영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 등에서 불교나 천주교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원규 교수(감신대·종교사회학)는 기독교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개신교가 비종교인들에게 호감도가 낮은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사회 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너무 인색하다. 전도 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준다,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한다,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필자는 교회의 대 사회적 책무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는 그러한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만큼 사회에 대한 봉사를 많이 하는 종파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지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사회봉사조차도 교세확장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단은 2004년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한국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물음에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가 양적 팽창, 외형에 너무 치우친다”라는 결론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로 인한 부작용은 교회의 세속화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이어야 할 교회가 그 생명력을 상실하고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재물을 더 귀히 여기고 진리를 위한 고난보다 진리를 인한 부와 영화를 탐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외형적 찬사와 영화를 꿈꾸는 것 때문에 특히 신도시나 재개발사업현장에서 전혀 덕스럽지 않은 교인쟁탈전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여전히 양적 팽창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합동측 교단은 오래전부터 일만 교회 운동을 벌여왔고 교단 통합을 통해 이 목표를 달성하자 이젠 2만 교회 운동 본부를 차렸다. 이에 뒤질세라 교단마다 3백만 성도 달성, 5천 교회 달성 등 나름대로 도달 목표를 발표하며 노력한다. 그러나 이번 93회 총회에서 보고한 각 교단의 교세 현황을 보면 그 증가 수는 극히 미미하다. 그토록 많은 재정과 인력을 쏟아 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성장은 여전히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떠나고 있는 젊은이들을 끌어 모은다고 교회마다 ‘경배와 찬양’이라는 광풍에 발맞추었다. 과거에 예배당 안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밴드 드럼을 비롯한 각양 악기들이 수용되고 있고 세상에서나 들을 수 있던 리듬의 음악들이 버젓이 교회 안에서도 연주되고 불러지고 있다. 다양한 제자운동을 비롯한 건전치 못한 전도운동들도 숫적 증가만 된다면 가리지 않고 다 수용하다시피 해왔다. 그 사이에 이단들이 기승을 부리며 영적 분별력이 되지 않는 교인들을 빼앗기고 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다고 세속 음악을 도입하여 부지런히 사용하더니 10년의 결과는 숫적 퇴보 자체였다. 그 이후 한국교회는 계속된 침체 속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지만 성경에 근거한 과감한 수술을 단행하지 못하고 있어 교회는 더욱 그 힘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3. 개혁의 시작은 강단에서부터
타락하고 부패하고 힘을 잃은 한국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다른 대안이 없다.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하자, 천주교처럼 중앙집권적인 지도력 개발에 힘쓰자 등등 많은 말들을 할 수 있겠지만 이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교회 개혁은 이젠 강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목사들의 철저한 자기 정밀 진단과 더불어서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성경 말씀에 근거한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 그것이 주님과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의 몫이다. 주께서 피흘려 세우신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의 할 임무이다. 한 지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필자는 무엇보다 교회 자체의 자기진단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많은 교회들이 정화능력을 상실하여 마치 사사시대 사람들처럼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처신해가는 듯한 인상이 짓다. 선지자적 사명을 띤 진리의 일군들이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때인 것이다. 성경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적용하여 성경 진리에 기초한 교회 모습 회복에 앞장 서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매 임직식 때마다 외치는 것이 있다. 특히 목사 임직이나 장로 집사 권사 임직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습니까?’ 이다. 다른 하나는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믿고 따르겠습니까?’ 이다. 그러나 과연 직분을 받는 자들 중 얼마나 많은 분들이 고백한 대로 실천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아니 필자가 알고 있는 바로는 대부분의 목사 후보생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어보지도 않으며 대소요리 문답서는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교회가 올바른 신학과 신앙위에 세워져가고 있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 편리한대로, 그리고 실용주의적 원리에 따라 오로지 교회성장만 된다면 무엇이든지 도입하고 보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많은 것을 잃었다. 특히 교회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상실했다. 교회 문턱을 낮추는 것은 좋았으나 교회의 생명력은 빛을 바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망각하고 말았다. 지금의 교회의 힘은 숫자의 많음과 헌금의 넉넉함과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와 교육적 기반에서 나오는 것으로 뽐내고 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하심과 진리의 힘은 언제나 뒷전이다. 진리를 훼손해서라도 사람들 모으기에 앞장설 뿐이다.
개혁교회 전통과 청교도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칼빈주의 신조를 신봉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필자가 판단한 가장 큰 원인은 성경적 설교 부재이다. 데이빗 웰스가 지적한 것에 의하면 미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중 설교의 내용과 구성 모두 본문으로 삼고 있는 성경단락에 따라 결정된 설교는 24.5%, 내용은 분명히 성경적이지만 그 내용에 근거해서 설교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틀을 가지고 설교를 구성한 경우는 22.5%, 내용도 구성도 성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전체내용이 기독교적인 설교는 39% 그리고 내용도 구성도 성경본문이 아니며 내용조차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설교가 14%나 달한다고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당수의 설교가 성경에 충실한 설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비율이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결코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 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입고 있는 한국교회 강단을 조사해 보면 미국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것이라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진리의 능력은 진리가 선포될 때 드러난다. 그러나 작금의 강단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는 강단보다 윤리 도덕적이고 심리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내용들로 점령당하고 있다. 최근에 옥성호씨가 쓴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이 이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허나 문제의 심각성은 강단에서 외치는 자들이 다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속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옳게 말하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보다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성경을 자세히 풀어 강론하는 것보다 주관적 진술을 말하는 주제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성경이 주재료가 아니고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충설명해 주는 보조 재료로 여기는 우가 도를 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이 제네바에서 보여준 강해 설교의 전형적인 모습은 오늘 개혁의 물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에서 회복되어야 할 패턴이라고 본다. 올바른 성경 강론이야말로 말씀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복음의 일군들은 성경이 요구하는 것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엔 헌신적인 노력과 지적 수고, 세밀한 탐사와 자기희생과 자기 부정 및 겸손함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더디고 힘들지라도 설교자의 모든 수고와 땀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합당한 것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가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실 자기를 살피는 일은 종종 우리 자신을 무척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때론 고통스럽게 만든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훈을 따라 구속함을 받은 자만이 다니는 거룩한 길로 나아가기까지 겸손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채찍질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차원에서 자기를 세밀하게 살피는 일은 지금까지 교회가 관심을 기울여 온 것들을 다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교회 안에 있는 개개인이나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이 제안한 제도적 장치나 방침들을 철회해야 하는 아픔을 수반할 수 있다. 즉 교회의 지침들이나 삶 또는 제도나 프로그램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일치되는 것이 아닌 것들은 버리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는 것이 되도록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즐겨하지 않는다. 성경의 이상보다 현실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철한 자가진단은 때로는 심한 반대에 부딪힐 수 있다. 성경 말씀을 따른 철저한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을 고집불통 또는 외골수, 또는 극단주의자, 광신적인 자, 이상주의자, 비판을 좋아하는 자 및 보수 골통들이라고 면박을 준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은 철저한 자기 점검을 통해서 일어났으며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 및 언약도들도 먼저 오염된 교회에 임할 불같은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탈된 교회들을 성경적인 교회가 되도록 자신들을 혹독하게 단련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에 두려워 떤 자들이 아니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살피는 일을 엄격하게 감행했을 때 세상에 미치는 힘이 막강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며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비판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했을 때 교회의 힘은 약화되었고 부패했으며 세상을 변혁시키기보다는 도리어 세속화의 길을 간 것이다.
교회가 올바르게 성숙해지려면 ‘과거에 다져진 기초위에 세워가는 일’이 필요하다. 물론 과거의 죽은 전통이나 오류들을 가지고 점검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그 자체를 말한다. 성경, 즉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진보를 이루는 것이다. 교회의 참 개혁은 성경에 기초한 교회로의 회복이다. 이 일은 설교자들이 성경의 전 경륜을 낱낱이 풀어 증거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교회나 성도는 항상 성경 진리에 매여야 한다. 그것이 세계화요 현대화에 반역하는 것이라고 비난받는 것일지라도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하나님의 눈에는 항상 신선한 것이다. 교회 침체나 사회적 비난으로부터 벗어날 기막힌 대안이 무엇이든 그것은 항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현재 교회가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규범인 것이 아니다. 현재 교회가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조차도 우리는 항상 영구불변의 진리인 성경을 따라 성경에 맞게 점검하고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의 시대에 주님의 교회를 개혁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이 시대 교회를 개혁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선조들이 들이댔던 잣대는 지금도 동일한 잣대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었던 성경을 우리도 믿고 있고 그들이 섬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가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주할 생각은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일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강단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흘러내리게 하는 유일한 곳이다. 거짓을 진리로, 진리를 거짓으로 왜곡시키는 현실을 바로 잡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변함없이 전파하는 것이다. 어떤 고난이 닥친다하더라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개혁자들은 설교를 교회에서 가장 귀한 일로, 최고로 존엄한 사역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사역자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 중 하나로 간주할 뿐이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하면서 설교도 그 중에 하나 일뿐이지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강단을 음악회로 혹은 공연장으로 쉽게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존귀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것이 설교자의 권위이다. 우리는 실용주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 항상 결과를 중시한다. 음악회나 연극은 금방 회중들의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더 선호한다. 그러나 설교 말씀은 그 효력을 금방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자람이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령한 양식을 잘 공급받는 사람은 건강하고 힘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성장할 것이다. 말씀에 충실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것, 소금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21세기는 과거와 확연하게 다르다고. 다르기 때문에 영상을 좋아하는 시대에 맞는 설교여야 하고, 감각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감성을 자극하고, 지식정보화 사회이기 때문에 많은 정보제공을 해야 하며,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아날로그 시대는 물러가야 한다고 항변한다. 그래서 복음 전파도 이젠 방법을 다르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인류 역사 중 어느 시대가 복음에 호의적이었는가? 죄인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주님의 진리에 감탄을 자아낸 적이 없다. 언제나 조소적이었고 적대적이었다. 언제나 반항적이었고 싫어하였다. 역사상 복음 전하기 좋은 시절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선진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은 언제나 적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언제나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절이 한 번도 없었듯이 앞으로도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시대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좋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시대이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더욱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촉구한 명령이었다. 비록 사람들의 일군 노릇하는 자들이 다수일지라도 소수에 해당되는 진리의 일군들에게 준 이 명령은 더더욱 절실한 것이다. 이 시대에도 사람들이 들어야 할 것은 진리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교회 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말씀에 대한 불신앙적 태도이다. 전자는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사람들 성가시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가 잘 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죄악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죄는 언제나 틈새를 노린다. 그 틈새를 비집고 상당한 영역을 배회하며 오염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수시로 자기 점검을 통해서 보다 나은 교회를 만들도록 힘써야 한다.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을 비롯하여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그 말씀을 믿지 않는 실천적 무신론주의자들이다. 성경 말씀을 믿지만 현실을 더 두려워한다. 세상의 전문가들의 말을 기록된 말씀보다 더 신뢰한다.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는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도 다 통한다. 세상에서는 세상 방식대로 살고 교회 안에서만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만들어낸 기형적인 그림이다. 이제 이 그림을 찢어버리고 겉과 속이 같은 진리의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도록 자기 백성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무기는 성경뿐이다.
성경만 가지고 목회할 수 없다는 거짓된 확신을 버리라. 오직 성경진리로만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케 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다. 말씀은 실천 가능한 말씀이지 공상이나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지 하늘에 사는 성도들에게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게 하는 방편이다.
4. 올바른 개혁을 위한 교회 강단사역의 실제
1) 강해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의 개혁은 항상 신실한 말씀 선포 사역으로부터 일어났다. 따라서 온전한 설교 사역이야말로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한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교회의 삼대 표지 중 그 첫째가 말씀 선포 사역임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설교는 언제든지 반드시 성경본문에 충실한 것이라야 한다. 설교의 주제는 선포할 본문에서 나오는 것이라야 하며 그 본문이 담고 있는 교리적 가르침과 교훈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설교하는 때와 정황에 적절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설교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한 범위를 정하고 강론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다양한 설교 패턴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성경적 설교는 강해설교이다. John T. McNeil은 칼빈주의 역사와 특징이라는 책에서 1519년 쮸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성사시킨 쯔빙글리(Zwingli)의 설교 사역을 강해설교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마태복음을 시리즈로 강론할 의향을 발표하면서 동료들을 깜작 놀라게 했다.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를 오직 성경 재료로만 강론하고(ex fontibus scripturae sacrae) 사람들이 만든 주석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풍성한 학문적 지식과 연구의 결실이었고 동시에 단순하고 확정적이며 열정이 넘치는 설교였다. 그 효과는 대단하여 단지 교회에 다니기만 하던 자들을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청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강해설교는 칼빈의 설교 사역의 모범이기도 했으며 청교도들의 주된 사역이었고 개혁교회 전통이었다. 이것이 잃어버린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이요 동시에 설교자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강해설교를 찾아보기 힘들고 대다수가 주제 설교를 선호하고 있다. 주제 설교를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성경 연구의 수고가 덜하다는 것과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장 잘 대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주제설교를 선호하는 이들이 반박할 것이다. 우리도 설교준비를 위해서 많은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설교 준비를 위해서 쯔빙글리나 칼빈이 보여준 성경에 대한 연구열의와 학문적 자질을 키워가는 수고보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 거리들을 찾는 수고가 더 많다. 성경 읽기와 묵상 및 탐구 작업보다는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 듣기나 혹은 예화거리 찾기에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심심찮은 설교표절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강론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것 또는 청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오늘날 설교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죄악은 성경의 정확무오성은 고백하나 성경의 충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실 설교자들만큼 말씀에 대한 불신앙적 죄를 많이 범하는 자들도 없다. 전파하면서도 믿지 않는다. 말씀의 능력을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조차도 거부한다. 칼빈은 아담의 죄를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이 아니었다면 감히 하나님의 권위를 대적하는 일을 결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것에 실패하는 것이 죄이다. 다시 말하면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데서 생기듯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귀 기울이는 데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강론하기보다 신변잡기에 몰두하고 별로 우아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거리들로 도배하는 것은 설교자로서의 임무에 대한 태만이요 동시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잠시 짚고 갈 것은 목사가 아이들에게나 혹은 청소년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몹시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과거 전도사 시절에 교육파트를 맡아서 수고할 때의 경험을 되살리지 못하고 장년 대상의 설교에 익숙해져 버린 것도 원인이지만 사실은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일이다. 구약의 토라는 장년층 그것도 배운 식자층 사람들을 위하여 준 것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고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들이 언제 학교 수업을 제대로 받았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토라를 들어야 했고 가슴에 새겨야했다. 더구나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훈육해야만 했다. 그들 중에 누구도 성경이 어려워서 아이들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어린이용 성경이 따로 출판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진리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영의 양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면 성령께서 청중들의 심령 속에서 이해되고 깨달아 알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선포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곁에 서서 도우시며 우릴 강건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설교자의 사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또한 현대교회들이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는 교회성장의 다양한 방법론들이 대부분 성경의 충분성을 신뢰하지 않는데 기초하고 있다. 성경만 가지고 안된다는 불신앙적 요소들이 성경 외의 방법들을 고안하면서 처음엔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지금은 성경보다 더 신뢰하는 것들이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 자체보다 교세 확장을 위한 성장방법론이 더 권위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제정하신 방법은 말씀 선포사역 뿐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유약한 인간을 사용하셔서 그의 말씀을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지적하였다. 하나는 하나님이 해석자들을 통한 인간의 방식을 택하여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시기로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 모두가 다 놀라 도망칠 것이 분명하다. 둘째는 우리의 겸손을 훈련시키고자 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말씀에 순종함이 익숙해지게 하실 때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 심지어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말씀이 선포되게 함으로써 우리의 순종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신다면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즉각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먼지만도 못한 하잘 것 없는 사람이 일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이 어떠함을 입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사용하시는 것은 신자들을 한 몸으로 함께 묶는 중요한 관계 형성 때문이다. 즉 교회는 결속력이 있는 집합공동체임을 확정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게 하셨다면 교회는 함께 모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말씀의 종들을 중심으로 함께 모이게 하셨다. 구원의 은총을 한 사람의 설교자를 통해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의 가르침을 필요 없는 것으로 무시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교회를 망치고 파괴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자이다. 현세의 생명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데에 태양의 빛과 열기 그리고 음식과 음료가 필수적인 요인이 되듯이 이 땅의 교회를 보존하는데에는 사도적 직분과 목회의 직분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설교자의 위치를 아주 높이 간주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서 소명을 받아 설교자가 된 자가 설교를 할 때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의 말씀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다. 말씀의 권위와 관련하여 설교자들이 미천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진리의 능력이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지적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탁월한 은사들이 많이 있지만 사람들의 입과 혀를 친히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시는 것이야말로 독특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친히 그의 입으로 선포하시는 구원의 도리를 순종으로 받아들이기를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외적인 수단에 매여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일상적인 가르침의 방식에 매우 두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설교자 자신들의 인식의 저조함과 존귀히 여기지 않는 청중들의 태도가 교회 쇠퇴의 원인이기도 하다. 청교도들이나 언약도들 그리고 18세기 대각성의 주역들 모두가 다 설교 사역을 교회에 있어서 최고로 중요한 임무로 간주하고 설교를 마치 하나님의 예언적 음성으로 간주했었다. 그러한 인식이 설교자나 성도들에게 깊이 각인 되어 있을 때 교회는 힘이 있었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대단한 것이었다. 설교는 세상의 교육이나 덕성함양 책망 및 선지자적인 비판 그 이상의 것이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적용하는 것이다(expositio et applicatio Verbi Dei).
2) 설교는 교리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한다.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설교는 개혁주의 신학이 풍성하게 드러나는 설교였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의 설교는 개신교의 모든 신학 사상 특히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나 구원의 은혜 및 올바른 교회론, 성례론 및 교회 정치까지 모두다 성경을 강론하여 피력한 것들이었다. 물론 당시 상황이 로마 가톨릭과의 구별된 관계설정에 더욱 촉각을 세워야 했기 때문에 교리적인 오류들을 지적하며 성경의 올바른 교리를 전달하고자 사력을 다한 것이었다. 그러한 특수한 상황에 처한 시대였을지라도 그들은 설교 사역에 있어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문맹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성도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가르침으로 못박은 것이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가감없이 유럽 전 지역에 강타해 버리게 하였다. 무지와 미신과 우상숭배로 가득한 대한민국을 강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이었음을 선교사들과 초기 설교자들의 활동이 증명하는 것이었다.
가장 성경 진리를 풍성하게 전달한 청교도들의 설교들은 하나같이 다 교리에 충실하였으며 성도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를 힘있게 전파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형성하였다. 즉 그들의 딱딱한 교리 설교들이 하나도 허공을 치는 것이 되지 않고 성도들의 실생활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실현되게 하는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설교였던 것이다. 즉 그들의 설교는 목회적이요 복음적이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의 주 메시지는 성경의 교훈함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알되 더욱 풍성히 알게 하며 그의 지혜의 높이와 길이와 넓이와 크기가 어떠한지를 흠모하도록 이끄는 설교를 찾아보기 어렵다. 신학이나 교리는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경 진리는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실 성경은 신학이 전부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고 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궁극적으로 교훈하는 유일한 지침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는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은 자리에서 생명으로 살림을 받은 모든 백성들은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더욱 알고자 몸부림침이 마땅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간주하는 것은 설교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 자신들도 그리스도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듣는 자들의 간지러운 귀를 긁어주기에 급급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성경 진리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사람의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이 있다(히 4:12). 그 능력을 맛보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이다. 설교자는 성경이 말씀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자를 쳐다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해야 한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주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슥 4:6).
설교 적용과 관련하여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청중들에 대한 연구가 설교 준비에 있어서 상당히 도외시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 눈높이, 청소년 눈높이, 장년 눈높이는 강조하는데 정작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에 매우 소홀하다. 다만 상당수의 설교자들이 재미있어 하고 싫증나지 않는 내용들을 말하려는 노력은 기울여도 그들의 영혼과 심령을 변화시키기 위한 진단은 매우 부진하다. 이에 비해 청교도들은 회중들의 상태를 여러 갈래로 분석하고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 청중들의 각양 상태에 적절한 적용을 구사하였다. 예를 들면 마음이 완악한 자들, 무지하나 배우려고 애쓰는 자들, 겸손한 자들, 온전한 교육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할 자들, 또는 바르게 교정을 필요로 하는 지적인 죄나 도덕적인 죄에 빠진 자들, 상처 받은 자들, 낙심한 자들, 의기소침한 자들 연약한 자들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처방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의 설교를 경험적이요 실천적 설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신구약성경 밖에서 만나지는 가장 성경적이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삶 속에 스며들게 하는 일에 탁월한 설교자들이었다.
3) 설교는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명백하고 단순한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은 위대한 설교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단순 명백한 선포사역이었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혼잡하게 한다. 아마도 설교자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참된 설교자의 자세는 아니다. 예배모범에서 교훈하고 있는 것도 같은 것이다. ‘말씀을 강론하는 자는 많이 연구하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조심하여 예비함이 옳으니...복음의 단순한 것을 따라 그 언어가 성경에 적합하고 듣는 사람 중 무식한 자라도 알아듣기 쉽게 말할 것이요 자기의 학문이나 재예를 자랑하지 말고 자기 행실로 자가의 가르치는 도리를 빛나게 하고 생각과 말과 사랑과 믿음과 정결함으로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설교 사역의 특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파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아듣기 쉬운 용어로 전달함을 포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어린이나 천민들을 위하여 따로 제작된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적인 진리는 스스로 지혜있다 하는 자에게서는 감취어져 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아이들이나 노인이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들이나 다 깨달아 알 수 있다. 다만 설교자의 입장에서 신학적인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어 강론하는 것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천사들이 쓰는 언어도 아니요 식자층이 쓰는 고상한 말이 아니라 대중들이 쓰는 평범한 말로 비상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설교이다. 이것이 사람의 간지러운 귀를 긁어주는 설교가 아니라 가슴에 파고드는 설교가 된다. 그런 설교를 들을 때 설교자의 음성이나 제스처가 기억나지 않고 위로부터 내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압도적인 음성만 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한 언어로 풀어줄 때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다. 참된 설교자는 거룩한 진리를 가지고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다. 리차드 박스터의 말처럼 ‘가장 명백한 말은 가장 무거운 주제들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웅변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설교는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청중들의 변화된 심령을 겨냥한다. 그것 때문에 청교도들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으로써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성경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서 모호한 말이다 수사학적인 미사여구나 말놀음은 의도적으로 피하였고 기품있는 단순성과 명확성을 확연히 드러낸 설교였다. 오늘 이 시대에 그토록 많은 설교들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중 석상에서 그리고 계속적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평범한 수단이요 도구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사역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극대화되어지며 믿음이 양육되고 사랑이 증대된다. 설교를 통하여 무지한 자가 훈계되며 게으른 자가 권면되고 격려받으며 목이 곧은 자가 책망을 받게 되며 연약한 자의 양심이 위안을 얻는다.’ 이러한 눈에 띠는 변화가 이 시대의 설교사역에서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가는 말
종교개혁은 제도의 개선이나 손상된 것을 수선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기 때문에 개혁된 교회일지라도 언제나 개혁의 대상이 된다. 그 잣대는 불변의 진리인 성경 말씀이다. 말씀에 비추어 본 우리 교회의 모습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개혁해야 할 것이 어떤 것인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은 항상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안주하고자 하는 것은 금물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이 규범은 아니다. 우리의 무지가 교회를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수 있다. 무지한 지도자들로 인해 무지한 백성들까지 곤경에 처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진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참된 일군들을 길러내는 일이 시급하다. 그리고 선배들이 물려준 믿음의 유산들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일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새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옛 것에서 새 것을 꺼내는 피나는 작업이 요망된다. 교회는 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긴 역사 속에 이어져 온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나라를 연약한 자들의 손에 맡기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손을 사용하시어 자기의 영광과 능력이 어떠함을 드러내신다. 전도의 미련한 방식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을 누구도 철회하거나 축소시킬 수 없다. 교회는 칼빈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오로지 ‘외적인 설교를 통해서만 세워지며 또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의 끈에 의해서만 묶여지며 하나로 연합하여 배우고 전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유지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도들은 설교자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설교자들은 겸손히 주님의 양무리들을 먹이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설교자의 타락과 부패는 곧 교회의 타락과 부패로 직결된다. 설교자의 권위 상실은 곧 말씀의 권위 상실로 이어진다. 실추된 교회의 자화상은 교회 지도자들이 만들었다. 성경을 불신하고 세속적 잣대의 부와 영화를 추구한 결과이다. 자기를 따르고자 한 제자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 짐을 포기하면 주님의 길을 갈 수 없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무엇을 위한 기도였는가? 자기의 원대로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위한 기도였다. 그만큼 자신의 소욕을 죽이고 아버지의 소욕을 좇는 것이 힘겨운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교회 지도자들도 주님의 심정에 맞춰야 한다. 내가 원하는 부와 영화를 꺾고 오직 구속하신 주님의 이름만 존귀히 되기를 갈망하는 씨름이 있어야 한다. 한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잖는가? 우리가 사역자로 남아 있는 동안 감당해야 할 일이다.
자기 부정은 철저한 자기 진단에서부터 출발한다. 불편과 고난을 각오해야 할 일이다. 십자가 없인 교회의 영광은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부인 교회를 ‘개독교’로 만든 책임을 통감하고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자. 철저한 성경 말씀 선포를 통하여 말씀의 위력이 우리의 심장과 한국에 다시 한번 강타하는 역사를 기대한다. 인간적인 기교나 방법론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말씀에 매여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인류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을 온 땅에 퍼뜨리는 설교사역에 전념하라. 진리를 거스리지 않고 오직 진리를 위한 일군들이 되기를 간구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