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갱신과 하나님 나라
- 신약신학 / 김세윤 교수 -
소금은 1)세상과 다른 것이며, 다름으로서만 세상에 무엇인가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나 2)세상 속으로 침투하는 것이며, 침투함으로써만 세상에 실제로 무엇인가 줄 수 있는 것이다. 소금이 이 두 가지 조건들을 갖추면, 그것은 세상의 부패를 막고,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을 보전하여, 이 세상을 살 “맛”나게 할 것이다. 교회는 그러므로 1)세상과 다른 자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2)세상 속으로 선교적 침투를 하여야 이 세상을 살 “맛”나게 할 수 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상의 소금이라 규정하였을 때, 그는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시작된 공동체가 비록 겨자씨와 누룩 같이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였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온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확신하셨던 것이다(막4:30~32 Pars;마13:22=눅13:20f).
긴 안목으로 지난 2000년의 역사를 보건데, 예수의 이 말씀은 많이 성취된 것 같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구원을 얻었다. 또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뒤집어 업고, 헬레니즘을 변화시켰으며, 서양의 기독교 문명을 탄생시켰다. 우리 한국에서도 기독교는 인권의식, 여성 해방, 미신으로 부터의 해방 등 얼마나 많은 문화적 변혁을 이루었는가? 그러나 같은 역사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독교는 서양에서도 한국에서도 얼마나 소금 노릇하기를 실패하였으며 누룩 노릇 하기를 실패하였는가? 세상의 물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 교회의 소금기(짠맛)는 다 용해되어버리고, 교회 내에서도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썩은 냄새가 진동하지 않는가?
오늘 이 땅에는 천만의 성도들이 있다고들 한다. 어느 한 주일 오전 이 땅의 인구조사를 한다면, 전 인구의 약 20%가 교회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땅은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부패가 방지되고, 참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고양되어 살 “맛”나는 곳인가? 거짓과 불의, 압제와 저항, 폭력과 대응 폭력, 퇴폐와 인간성의 황폐... 이 땅의 상황을 이구동성으로 “총체적 난국”이라 하지 않는가? 왜 이 땅의 교회는 더 이상 겨자씨나 누룩만큼 작은 것이 아닌데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누룩 노릇을 못하는 것일까? 왜 소금 노릇을 못하는 것일까?
우리 보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는 자유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물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소금기”를 잃어버림으로써 세상의 소금 노릇을 하지 못한다. 세상의 사상들 또는 시대정신에 적응하기 위해서 세상의 지혜와는 다른 하나님의 지혜,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거침돌” 성격을 포기함으로써 “짠 맛”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cf. 고전1:18~2:16). 그러면 그들이 세상의 소금 노릇을 못 할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우리 보수 그리스도인들은 왜 세상의 소금 노릇을 못하는가? 두 가지 이유들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우리 기독교의 “소금기”(곧 정체성)를 세상의 물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즉 성별의 원칙을 너무 강조하여, 세상 속으로 침투하여 우리의 “짠 맛”을 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옳지 않는 존재론적 또는 종말론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이 세상을 포기하고 정죄하며, 자신들의 선민의식을 앙양하면서, 교만, 자기의 배타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적극적으로 대화하여 그들을 설득시키려 하기 보다는, 선교라는 이름하에 그들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일방적으로 우리의 복음을 우리의 특수어로 선포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이런 경향이 고대나 중세 교회의 수도원 이념으로 극단적으로 표현 되었지만, 오늘 이 땅의,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일부 형태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교회가 이런 형태를 보일 때 이 세상의 소금 노릇 하지 못할 것은 물론이다.
우리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 노릇을 하지 못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도 기독교의 “짠 맛”(정체성)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 하는 데 있다. 오늘 대부분의 보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찾는가? 또는 세상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믿음이 그들의 정체성의 근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제로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이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성경 읽고 기도생활하며, 십일조 등 헌금하고, 술 마시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으며... 등등 몇 개의 외형적인 규범들을 따르는 것만으로 주로 표현되는가?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몸같이의 사랑(막12:28~34 pars)으로 표현되는가?
우리의 정체성이 후자로 더 두드러지게 표현되어야 우리는 진정으로 세상의 소금 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물신주의의 우상숭배가 얼마나 많은 가치관의 도착, 사상의 혼란, 인간성의 황폐화... 한마디로 세상의 부패를 가져오고 있는가? 오늘날 이웃사랑의 결핍이 인간관계를 얼마나 살벌하게 하는가? 모든 거짓과 불의, 압제와 착취, 갈등, 퇴폐와 추악함... 이것들이 다 어디서 오는가? 이런 것들을 몰아내고, 대신 참과 선과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이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일진대, 우리가 이 사명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 같이의 사랑외의 어떤 방법으로 이룰 수가 있을까?
우리의 정체성이 전자만으로 표현되면, 그것들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기만 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만하여, 소금의 둘째 조건, 즉 세상 속으로의 선교적 침투를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사실 세상을 변화시킬, 그리하여 살 “맛”나게 할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신학과 삶과 사역의 자세의 모든 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놀랍게 정확히 이어 받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인들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절실한 지침을 준다. 고린도인들이 그에게 제기한 질문들 중 하나는 우상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통하여 도살되어 푸주간에 나와 있는 고기를 그리스도인들이 먹을 수 있는가 이었다. 이 문제는 당시 고린도교회의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한 쟁점으로,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비기독교적 환경과 어떻게 교류하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원칙적인 문제의 한 구체적 표현이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전 8장에서 10장에 걸쳐 아주 신중히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결론 한다. 즉,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1.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우상에 바쳐졌었는지 따지지 말고 먹으라.
2. 이웃집에 초대되었을 때, 주인이 내놓은 음식도 따지지 말고 먹으라.
3. “약한” 형제에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으면 그 음식을 먹지 말라.
4. 우상숭배(또는 우상의 신전에서의 잔치 참여)는 절대 안 된다.
이와 같이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세상과 물질을 적극적 평가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이 근본적인 자유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우상숭배 금지)과 이웃사랑(“약한”형제 고려)의 원칙과 함께 천명하고 있다. 고전 8~10에서의 바울의 논지는, “약한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강한 자들”과 함께 천명하는 것도 포함하지만, “강한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의 원칙들에 따라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제약 해야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그는 고전 9장에서 자신의 사도적 형태를 모범으로 제시한다. 이 과정 중 바울은 자신이 더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어 그들의 율법을 지키고, 율법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 같이 행한다고 말한다(고전9:19~23).
바울이 유대인들간에서는 준수하되 이방인들간에서는 무시한 율법들이 무엇일까? 아마 할례, 안식일, 음식법들 등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법들을 자신들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됨의 표징들로 보고, 또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보호하는 “담장”으로 보고, 그들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adiaphoron으로 보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사랑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 한 것이다. 이것은, 한편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음식법들을 무시하고(막&:15, 19 par;cf. 롬14:14, 20)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다른 한편, 율법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 같이의 사랑으로 요약하시고, 전자에 집착하며 후자를 등한시한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로 호되게 꾸짖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완벽히 따른 것이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전자에서 자신들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며 성별을 강조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소금기”를 유지하였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 쓸모없는 “소금기”이었으며, 세상으로부터 따돌림만 당하여 ghetto를 형성하고,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선택의 뜻은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앞의 질문에 돌아온다. 오늘 우리 보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가?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안식일 지킴(특정한 방법대로 주일성수)이나 음식 가리기(술, 담배삼가)등 외적 표징들에는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 점들에 있어서 조금만 흐트러져도 큰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물신주의의 우상숭배에 빠지고 이웃을 억누르고 더(물론 물신주의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려고 날마다 날뛰는 데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지 않은가? 자기 회사에서 직원 예배를 신실하게 하면서, 탈세, 뇌물주기, 불법, 노동자 착취 등을 일삼는 장로 사장들이 우리교회에는 얼마나 많은가? 기독교인 행세하는 정치가들과 고관들중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백성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도외시하고, 대신 자신의 권력욕을 불태우며 불의와 압제와 착취를 일삼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권력자들에 아부하여 이권 운동하는 목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가 adiaphoron으로 여긴 것들을 도외시하는 한, 우리는 옛 유대인들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소금노릇 하기는커녕, 위선자들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 아닌가?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 같이의 사랑을 그리스도인 됨의 진정한 정체성의 표징으로 삼고, 그들을 실천하려 애쓰며, 위에 말한 그리스도인 됨의 외형적 표징들도 이 두 계명들에 비추어 더욱 적극적으로 표방 할 때, 우리는 물신주의의 우상숭배와 이기심으로 썩어가고 죽어가는 이 세상에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소금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초월의 하나님을 믿고 그의 은혜로 물신주의의 우상숭배와 이기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외에 그 누구가 세상에 소금 노릇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교회도 함께 썩어 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우리는 가끔 이단의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주위가 새로워지고 진리와 의, 사랑과 평화, 기쁨과 아름다움이 있게 됨을 보고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재확인하고 희망과 용기와 결단을 새롭게 한다.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의 소금 노릇하기를 거의 실패하고 있는 데는 물론 목회자들이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 하고 제대로 순종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의 본질, 즉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 같이의 사랑 보다는 그것의 겉모습에 더 집착하고, 성도들에게도 전자를 더 강조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배우고 올바로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귀한 직책에로 소명 받은 신학들이여! 그대들은 장차 목회의 현장에서 무엇을 그리스도인 됨의 진정한 징표로 가르치려는가? 그대들은 세속사회의 물신에 대한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가르치기 위해, 지금 스스로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그 헌신을 실천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지금 기숙사에서, 통학 버스 속에서, 강의실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가?
- 총신원보 1992년 10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