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귀신쫓음)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마 12:28)
- 윤석준 목사 -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엑소시스트’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오랫동안 있었던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미신이 대단히 많은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이런 종류의 축사행위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교황청에서 이것을 승인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로마교회의 특징은 일반 신자들의 주술적 믿음과 뿌리깊게 연관되어 왔고,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그들의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 칼빈이 쓴 아주 작은 소논문을 재미삼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제목이 『칼빈의 성유물에 대한 비판』(솔로몬)이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그 많은 자료를 일일이 수집하여 반박한 칼빈의 치밀함에도 혀를 내둘렀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미신적 가짜 성유물들이 판을 치고 있는(현재에도 그 양상이 줄었을 뿐 본질은 비슷합니다) 로마교회의 그 어리석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는 전형적으로 개신교보다는 로마 교회의 소유물이었던 느낌이 강하고, 또 정상적인 개신교회에서는 이런 류의 일들이 터부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인데, 한국교회는 종교적 정서상 이런 류의 내용들도 나름대로 발전해 온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네 정서가 무언가 영적이고, 신비적인 이런 일들을 좋아하는 듯 하달까요? 종교의 영역이니까 어쨌건 이런 신비적인 영역, 영끼리의 싸움, 귀신을 쫓아내는 승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는 것이 실제 생활에서도 귀신의 쫓음으로 나타나는 것.....등 이런 방식으로 많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부터 목사님이 권사님들과 함께 귀신 들렸다는 사람 집에 심방을 가서 몸에다 손을 얹고 바람 소리를 입에 실어 가면서(꼭 이런 기도는 이렇게 하시더군요 다들), “쥬 예슈 그리셔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샤단아 물러갈 쮜어다!”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이것은 낯선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밤중에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무서울 때면 교회 전도사님들이 “그럴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기도하라”?가르치는 말씀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제가 자랐던 교회에서는 실제로 청년회장이었던 형이 귀신에 들려서 어른들이 열 명 가까이 둘러앉아서 눈이 뒤집혀진 그 형을 중앙에 놓고 축사기도를 하던 것을 본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TV에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방송되는 것을 보고(오늘날은 이런 종류의 내용을 고정으로 내보내는 케이블 방송도 있더군요)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귀신을 쫓거나 싸우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저 사람들이 하는 것과 교회에서 하는 것이 비슷할까?”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TV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여러 가지 목소리를 내면서 다중인격의 증세를 보이는 것은 기도원 같은 데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과 유사했고, 그것을 쫓아내는 방법 역시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하고, 승려들은 염불을 하고, 무당들은 굿을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똑같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최면술사가 최면술을 통해서 소위 귀신들렸다고 하는 사람과 똑같은 장면을 연출해 내는 것을 보고 매우 흥미가 생겼습니다. 심리학이나 최면술의 입장에서는 사실 귀신들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문적 영역에서는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내면적 영역 안에 또 다른 인격체가 있다고 잠재적으로 믿는 것”일 뿐이지,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이란 없습니다. 보통의 귀신들리는 사람들은 내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약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은연 중에 자신이 누구에겐가 조종당한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커다란 어두운 세력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이 사람에게는 이러한 증상이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언젠가 제가 인터넷을 뒤져서 보게 된, 최면술로 축사와 똑같은 흉내를 내는 사람이 보여준 모습은 굉장히 흥미로운 것이었습니다. 실제 자신이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피실험자로 데려다 놓고, 이 사람들에게 최면술을 건 다음에 “자! 이제 당신의 속에 있는 또 다른 존재를 불러냅니다. 하나 둘 셋 하면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납니다. 레드 썬!” 뭐 이런 식입니다. 최면술 기법을 통해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하면, 이 사람은(원래 귀신들린 증상을 보인 사람) 귀신이 들렸을 때와 똑같은 증상을 보입니다. 목소리가 변하고 다중인격 증상을 보이고, 귀신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실제 이 프로그램에서 피실험자였던 귀신들린 사람은 최면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귀신들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는데, 자신이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승려나 무당이 귀신을 쫓아내 줄 때 그가 느꼈던 것과 최면술을 통해서 그 증상을 경험했을 때의 느낌이 똑같았기 때문이죠.
이런 방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귀신에 관한 모든 제반 경험들이 모두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불안에 기반한 것으로 “거짓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귀신을 쫓는 행위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요? 한국교회에서 보이고 있는 일련의 반응들과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 문제의 해결점은 성경이 다루고 있는 ‘축사’와 ‘신유’가 공통분모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병 고침이라는 것이 성경시대에 있었던 것이 지금 똑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살핀 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병고침은 병고침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병고침을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는 어떤 것에 주안점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앞의 글에서 확인했듯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라는 점이 이 신유를 통해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즉 주님께서 병을 물리치신 것은 그가 메시야로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다는 것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실은 축사도 항상 신유와 같은 맥락에서 접근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성경구절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주목해야 할 점은 축사와 신유가 같은 맥락에서 함께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마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막1:32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1: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눅9: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이 구절들이 보여주는 바는 성경이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거의 같이 취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주님께서 치유하신 것이 보통 “병든 것”과 “귀신들린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고, 성경을 많이 읽어보신 분들께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축사와 신유는 비슷한 성격을 가질까요? 그것은 우리가 신유에서도 언급하였고, 방금도 제가 말씀드린 내용에서 기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적은 지면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다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신약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머언 곳에 있는 왕국이나 천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신 곳”, “하나님의 왕권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엄밀히 말하면 지역개념이 아니니 ‘곳’이라고 쓰는 것도 고려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 곧 “하나님의 임재”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계신 현실은 하늘이 땅에 내려와 있는 상황입니다. 즉, 주님의 성육신으로 인해 하늘이 땅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당연한 이야기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쫓겨나기 시작합니다. 즉 “죄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된 부산물”들이 쫓겨나게 됩니다. 이 쫓겨나는 것들이 바로 죄의 영향력으로 생겨나게 된 ‘질병’과 ‘귀신들’입니다.
저는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문둥병 규례”를 주로 사용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진 밖으로 나가 따로 살게끔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염을 염려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거룩’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그들은 진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 하시매” (민5:2-3)
이 사람들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죽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편이었습니다. 다른 병들은 다 괜찮은데 굳이 나병이 선택된 이유는 나병이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죽음의 징후를 보는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병은 산 사람의 피부가 죽은 자들처럼 썩어 들어가는 병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으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죽음’이, ‘죄’가, ‘사망의 영향력’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시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서도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신 그분께서는 “죄의 영향력의 산물이었던 병과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사역들을 그의 주된 사역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신유 파트에서도 말했지만, 이는 철저하게 “병을 고치는 것”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사실과, 그 분께서 메시야이심을 보여주시는 징표로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축사는 “하나님 나라 임함의 징표”라고 성경이 가르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2장 2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12:28)
주님께서는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의 징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은 축사의 행위를 통해 한 사람을 해방시켜 주거나 사람들의 증상을 해소시켜 주는 것에 일차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는 데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축사 행위 자체가 목적으로 취급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한 수단으로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징표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내어 보내실 때도 그들에게 권능을 주시면서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표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16:17-18)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시대에 귀신을 쫓아 내셨던 일 역시 신유와 마찬가지로 보다 더 중요한 어떤 국면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축사에 대한 입장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확고한 것입니다.
이런 성격의 축사가, 과연 오늘날에도 존재할까요? 신유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말씀 드린 바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단히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셨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후 교회들이 형성된 시기에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는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유가 서신서에 거의 나타나지 않듯, 축사 역시 서신서에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이것은 예수님과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사도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특징적인 사역이었는지 몰라도, 이후 교회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것이 서신서의 배경인 신약 교회들에서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신유나 축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임함” 혹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 참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그 참 목적을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서신 안에 있는 모든 교회들 안에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통해 실질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가거나 신유를 통해 병을 쫓아내는 행위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주변에서 많은 귀신들림의 현상이나 축사기도들을 듣고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경험되는 귀신과 관련된 것들의 대부분이 가짜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대다수의 현상들은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불안증세와 내면적 자아의 문제에서 오는 심리학적 증상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것을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린 증상”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불교신자는 같은 증세를 접신이나 조상신이 내린 것으로 이해합니다. 같은 증상을 정신의학계에서는 단지 정신분열이나 우울증, 조울증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진단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의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는 종교적이다 뿐이지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나 가톨릭에서나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결국 귀신들림이란, 종교에 따라 똑같은 현상들이 영적인 모습을 가지고 나타날 뿐이지 이런 것이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대부분의 경우는 몸을 두들기면서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뿐 아니라, 정신병리학적 치료를 통해서도 나을 수 있고, 쌀을 뿌리며 염불을 하는 것과 같은 다른 종교의 축사행위를 통해서도 나을 수 있습니다. 귀신에 관하여 가장 좋고 건전한 신앙생활은 귀신에 대해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에 대해 아예 이야기하지 않는 보수교단의 교회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한 명도 없지만, 늘상 귀신이야기를 하는 기도원이나 베뢰아 이단들 교회 같은 곳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넘쳐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이것은 ‘신앙’을 가장한 인간 내면의 두려움을 증폭시킨 결과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셨을 때, 하나님 나라가 세상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는 점이 나타났고, 이후 신약교회는 이 하나님 나라의 현시(顯示)로서 이땅에 주어졌습니다. 건전한 신앙으로 기독교 미신을 극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