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성탄절, 성탄 행사
해마다 12월에 접어들면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가 시끌벅적해진다. 이는 비록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양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에게 성탄절 카드를 보내고 집과 거리에 번쩍거리는 성탄절 장식을 한다.
기독교에서 유래한 성탄절인 만큼 교회들은 더욱 분주해진다. 예배당 종탑들마다 빨강색이 주도하며, 현란하게 움직이는 네온싸인과 어우러지는 성탄절 음악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하다. 교회들은 제각각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기도 하며 음악회나 성극을 준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 행사들이 도리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순수하고 좋은 의도로 성탄절을 부각시킨다 할지라도, 그 때가 청소년들의 탈선과 잘못된 소비 심리를 유도하게 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양상은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실로 놀라운 사건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멸망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천박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랑의 극치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던 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으며 거리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시대에는 성탄절이라는 절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일을 챙겨드린 기록이 없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초대교회는 그의 탄생일을 기념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룩하신 사역 자체에 깊은 의미를 두었을 따름이다.
성탄절이 생겨나게 된 것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난 이후부터이다. 기독교를 불법으로 정죄하던 로마제국은 원래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은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12월 하순의 한 날을 ‘태양의 날’로 잡아 특별한 종교적 행사를 치렀다.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는 12월 25일을 예수가 탄생한 날로 공표를 하고 성탄절로 지키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국교화된 후에는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마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인 양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이 태어난 시기가 12월 하순이라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12월 25일이 예수님이 출생한 날이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성탄절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 날이 도리어 우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성탄절을 거부했으며, 1643년 영국의회에서는 성탄절을 지키지 못하도록 법령을 제정했다. 미국으로 이주해 간 청교도들 역시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으며, 1659년에 제정된 마사추세츠 법령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경축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내도록 했다.
우리시대에 들어와 성탄절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상업주의 때문이다. 지금도 성탄절을 가장 기다리는 사람들은 백화점을 비롯한 성탄절 특수를 누리는 자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그들 외에도 성탄절을 앞두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괘락을 즐길 수 있는 떠들썩한 성탄절 분위기가 의미 있을 따름이다. 그런 자들에게 인간의 몸을 입고 죄악세상 가운데 오신 주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성탄이 아니라 즐길 수 있는 성탄절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숙한 성도들은 이점을 잘 분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성탄이 의미있을 뿐 성탄절과 그에 따른 다채로운 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의 상업주의적 분위기에 휩쓸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기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격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순진한 어린이에서부터 이미 상업주의적 성탄절에 익숙해 있는 교인에 이르기 까지 모든 성도들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르게 잘 깨달아야 한다.
- 이광호 목사, 교회연합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