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간증은 예수 사랑의 고백이어야 한다

안산 회복 2012. 10. 8. 08:46

 

  나는 시카고 기독교 방송국에서 간증을 부탁받은 지 오래 되었다. 한 마디로 거절해 버릴 수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뤄왔다. 간증의 한계성을 고려해 볼 때 더더욱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가끔 방송을 통해서 듣는 간증이 내게 감동을 줄 때도 있고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감동을 준다. 그래서 교회 이곳 저곳에서 간증집회를 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구원을 받았던 한 여인의 사건을 묵상하면서 우리들이 간증에 대해 갖고 있는 허상들을 벗겨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한 여인의 간증을 통해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않았을지라도 그 여인의 간증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을 것이다. 그 여자의 간증을 듣고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보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제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줄 앎이라(요 4:42).'

  여기서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께서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해 주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의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를 낱낱이 알고 있는 주님이 정말로 신기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간증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신비한 경험을 단지 간증으로 이야기로 들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과거를 맞춘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예수께 직접 과거를 고백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간증은 처음에 자신들에게 들려준 여인의 간증만큼 신비함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 개인 개인에게는 굉장한 간증이 없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신기한 간증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는가? 비록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육신적으로 대면할 수 없다 할지라도 글로, 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번이고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의 음성을 더 생생하게 듣고 더 확실하게 예수의 뜻을 알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로 쓰여진 말씀보다도 사람들의 경험을 더 듣고 싶어하고 또 그들의 경험을 더 신뢰하려 한다.


1. 예수 때문에 믿는 예수

  어떤 간증자가 극적 효과를 위해서 과장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냥 웃음을 보내고 박수를 치는 경우도 많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마음에 맞게 나름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간증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경우 간증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간증과 꼭 같은 경험이 본인에게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낙심을 한다. 다른 사람이 어려웠을 때 혹은 병이 들었을 때 나타났던 기적이 자신에게 꼭 같이 나타나지 않을 때 실망하지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죽은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4-25).'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영생을 얻는 기적을 어떻게 경험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들의 음성,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개인이 직접 들어야 살아날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신비한 간증이나 그들의 경험을 듣고서 죽었던 자가 살아날 수는 없다. 간증이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 간증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간증은 다른 사람들을 예수에게 안내해서 그 분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자신의 간증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간증을 입증된 사실이나 진리처럼 강요해서는 안된다.


2. 간증의 단점

  간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특별 대우를 해주는 분으로 소개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신의 믿음이 돋보이기를 바라는 유혹이 따른다. 간증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 대우를 받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의 특별한 여건 때문에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닌데 간증에는 항상 나의 특별한 여건을 부각시켜서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상황에 따라 조절된다는 인상을 주고 싶은 유혹이 따른다. 주님조차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하시지 않고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요 5:30), 또한 자신이 자신을 증거하는 것조차 '나를 위해 증거하는 분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증거는 참되다(요 5:31-32)'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선 자신을 증거하면서도 그 증거의 객관성을 하나님 아버지께 두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간증은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객관성이 결여되기 쉬운데 간증을 듣는 사람들은 과연 이 간증이 얼마나 신실하며 객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간증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특정한 부분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청중은 조심스럽게 간증자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대로 해석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증거를 받으시면서도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 5:34)'하고 말씀하셨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36절)',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39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간증보다는 성경을 상고하라는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으나 영접하지 않다가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니까 영접하듯이(43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성경의 증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온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서로 영광을 취하는 것(44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다(44절)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듣는 대부분의 간증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나 기적으로 병이 나았다든가, 아니면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는 내용들이다. 예수를 믿었지만 나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한다는 고백, '오직 예수' 때문에 감사하다는 고백은 그리 많지 않다. 계속되는 역경과 매일 실패를 거듭하는 삶일지라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믿음의 생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예수를 믿어서 나의 형편이 좋아졌다든가, 부자가 되었다든가 하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없지만 '내가 어찌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그 큰 은혜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만족한다'는 간증이 더 필요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런 간증에 감동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이런 종류의 간증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부분인 것만은 분명하다.


3. 간증집회가 성공 사례 발표회인가?

  어떤 간증집회에서는 옛날 옛적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 발표회장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성공 사례담'을 듣기 위해 권력이 있는 정치인들이나 성공한 기업가들이나 인기 있는 연예인들을 강사로 초빙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유명한 사람들의 성공사례가 있어야만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가 없다(요 5:44).'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우리는 죽은 나사로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 때문에 살아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살아난 나사로를 다시 죽일 음모를 꾸미지 않았던가? 누구든 진리를 믿지 않으려 한다면, 예수를 믿지 않으려 한다면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기적도 믿지 않는 판국에 어느 유명한 사람의 간증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효험이 있겠는가? 사람들의 간증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를 핑계를 대서라도 안 믿으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간증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처럼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한 부자의 아버지 집에 가서 간증을 해도 믿지 아니 한다(눅 16:20-31).

  성경에는 나면서 소경되었다가 예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한 다음에 밝은 눈을 갖게 된 한 소경의 기적 사건이 있다. 그가 원래 소경 걸인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이웃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이 했다. 그 사람은 주님을 통해 자신의 눈을 뜬 경위를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을 했지만 그의 간증은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 갔다. 그가 고침을 받은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소경 걸인의 놀라운 간증은 수없이 많은 검증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끝내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전통적 편견 때문이었다. 아무리 놀라운 간증이라도 듣는 이의 편견에 의해서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간증보다 더 확신에 찬 간증이 또 어디 있으며, 감정이 절제된 사실만의 보고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에 기록된 간증의 특징은 언제나 동일하다. 누가 언제 읽어도 그 내용이 동일하고 그 진술 방법이 동일하고 누구도 거기에 감정이나 살을 더 붙일 수가 없다.


4. 간증이 성경을 대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간증보다 더 나은 간증을 들으려고 단순히 눈에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경험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결코 자신의 간증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간증만을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성경에서 직접 간증을 들어 보라'고 말해 주고 싶을 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의 신비한 간증을 수집해서 자신의 이야기꺼리가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간증이 없다면 그 영혼의 공허를 누가 채워줄 수가 있겠는가? 간증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를 만난 경험이다. 자신의 간증으로 다른 이를 설득시켜 예수를 믿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앞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간증은 다만 진솔한 자신의 고백일 뿐이다. 간증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의 진술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간증은 자신의 변함없는 예수 사랑의 고백이어야 하고, 가감이 없는 진실이어야 한다. 그 간증이 남을 설득시킬 수는 없더라도 주 앞에서 자신이 설득당한 감격만큼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변함없어야 한다. 남을 감격시키기 전에 자신의 처음 사랑, 주님을 향한 첫 사랑의 감격이 메마르지 않도록 자신을 추스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정말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성공 사례가 있더라도 나를 통한 하나님의 성공을 이야기할지언정 자신의 성공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 이 글은 재미(在美) 칼럼니스트 김우영씨의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