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는 하나님 은혜의 행위이며, 선물이다 (조병수 교수)
은사는 하나님 은혜의 행위이며, 선물이다.
로마서의 은사연구 - 해석적 고찰(1999.4. 신학정론, 조병수) - 에서 발췌
* 은사에 대한 적극적 태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은사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은사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인 태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큰 혼란을 발견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 몇 가지 대표적인 혼란을 살펴보자.
첫째로, 은사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혼란은 은사의 성격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은사를 생각하면 우선 특별한 현상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친다거나 말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거나 앞날을 미리 알게 된다거나 하는 현상들이다. 이것은 소위 은사의 "기적적인" 현상들이다. 그러나 은사를 이렇게 기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큰 잘못이다. 은사에는 재능과 결부된 어떤 예술적인 일들도 포함된다. 음악이건 미술이건 예술적인 은사들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선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편에서 많은 연습과 노력을 하는 것이 요청된다. 더 나아가서 은사가운데는 아주 일상적인 은사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은사들은 사람의 성품과 잘 조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시되 때때로 사람의 성품을 고려하여 그에 맞는 은사를 주시며, 이렇게 함으로써 일상적인 모든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게 하신다.
둘째로, 은사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또 다른 혼란은 은사의 성격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은사만을 지나치게 선호하며 강조하는 경향에 근거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은사는 그 성격을 따라 분류해보면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기적적인 은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신유나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들이다. 이러한 추구는 기독교 교회를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 편중화시키며 획일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오직 몇 가지 은사에만 집착하는 것은 기독교회를 건조하고 단조롭고 고집스런 집단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회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증명해 낼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주후 2세기에 활동했던 몬타누스나 그의 추종자들(몬타니스트), 중세시대를 어지럽혔던 종말론적인 환상가들, 개혁시대에 일어났던 재세례파의 예언운동을 말할 수 있다. 이런 운동들은 모두 기독교회를 왜곡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혼란은 은사들의 의미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기적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은사들은 물론이고 예술적이며 일상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은사들에 있어서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대체적으로 모르고 있다. 따라서 은사를 현상적으로만 감지하며 체험할 뿐 은사가 본래 목적하는 내용에 대하여는 상당히 무지하다. 이 때문에 기독교 교회 안에는 은사와 관련하여 통일성을 잃어버린 채 걷잡을 수 없는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넷째로, 바로 여기에서 은사와 관련하여 가장 중대한 혼란이 야기된다. 그것은 은사를 개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지는 개인적인 체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일종의 표준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은사를 개인적인 체험으로 생각하는 이상 그것을 평가할 표준이 있을 수가 없다.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모든 객관적인 평가와 표준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점이 파생된다. 그 한 가지 문제점은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 앞에서 교회적인 평가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어떤 제재도 가할 수가 없다. 이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문제점은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성경적인 평가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무슨 발언을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어떤 것에도 평가를 받지 않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은사는 스스로 표준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은사는 오히려 교회를 평가하게 되고, 심지어는 성경을 평가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text)을 가지고 현상(context)를 이해하지 않고, 현상(context)을 가지고 성경(text)를 이해하는 무서운 오류가 발생한다. 성경진술이 은사체험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체험이 성경진술을 평가한다. 성경진술이 표준이 아니라, 은사체험이 표준이 되고 만다. 표준이 전도된 것이다. 이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현상(context)이 표준이 되면 진리는 항상 불안하다. 진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변함없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경(text)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
* 은사에 대한 소극적 태도
이에 비하여 오늘날 은사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교회들도 적지 않다. 은사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은사에 대하여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는 교회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은사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목회자를 무시하며 불순종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것도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든다. 게다가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분당을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로 말미암아 많은 교회들이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교회들은 은사하면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은사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향과 은사를 배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결 론 : 은사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선물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몇 구절 밖에 안 되는 은사 구절을 가지고도 은사에 관하여 많은 것을 교훈한다. 은사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은사가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사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롬 5:1512:6).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다. 은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른다(롬 11:29).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은사도 그러하다. 바로 이 때문에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가진다. 은사에는 몸에 지체들이 있는 것처럼 다양성이 있다. 평범한 은사가 있기도 하고 특이한 은사가 있기도 하다(롬 12:6∼8). 그러나 은사는 지체들이 몸에 있는 것처럼 통일성을 가진다. 은사 가운데 서로 연결되고 조화되지 않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셋째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의지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자력적으로 개발되는 것도 아니다. 은사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인 가치를 초월한다. 은사는 힘으로 획득할 수 없을 정도로 물리적인 노력을 배제한다. 따라서 은사는 영적인 것이라고 묘사되며(롬 1:11), 구속사적인 것이라고 설명된다(롬 11:29). 은사가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은사에 대하여 교만하게 자랑할 것이 없고, 겸손하게 감사해야 한다.
넷째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목적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사는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롬 1:11). 모든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가장 중요한 은사는 영생이다. 은사는 죄의 삯을 파기하고 영생을 허락한다 (롬 6:23). 은사는 아담의 원죄와 심판을 해결하며, 범죄로부터 칭의로 나아가게 한다(롬 5:15∼17). 이런 의미에서 은사는 모든 성도에게 근본적이며 포괄적인 성격을 지닌다.
- 출처; http://bible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