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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관상기도에 대한 진단과 대안 (김성봉 목사)

안산 회복 2011. 4. 19. 10:43

소위 관상기도에 대한 진단과 대안


김성봉

(신반포중앙교회 담임목사)



  시작하는 말


  우리 주위에 흔히 있는 부르짖는 기도에 비하여 조용히 묵상하는 기도에 대한 요청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늘을 향하여 달라고만 하는 기도에 비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도 있을 수 있다. 기도에 대해서도 우리가 해 온 관행을 넘어 성경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1.그동안 우리 주변에 흔하게 있어 온 기도 행태들과 그에 대한 반


  1)그동안 우리 주변에 흔하게 있어 온 기도 행태들

  그동안 우리 주변에 흔히 있어 온 기도 행태는 한편으로는 부르짖는 기도요, 다른 한편으로는 달라는 기도였다. '주여!' 삼창을 외치고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주시옵소서'라고 구한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했고 이렇게 하지 않는 기도는 뭔가 간절함이 없는 듯이 여겨졌었다.

  

  2)그런 기도 행태들에 대한 반성

  반드시 부르짖는 기도만 참된 기도일까? 조용히 묵상하듯이 기도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반드시 달라고 해야만 기도인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할 수는 없을까?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와 아울러 조용히 묵상하듯 하는 기도도 아울러 지지하며, 달라고 하는 기도와 아울러 주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도 아울러 지지한다.


  2. 소위 '관상기도'에 대한 변호


  우리 주위에 비교적 건전하다고 여겨지는 분들이 관상기도를 주창하면서 관상기도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1) L목사의 경우

  G교회의 L목사가 최근 관상기도(觀想祈禱)에 푹 빠져 있다는 소문은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소문대로 '국내 최고의 설교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L목사는 지금 관상기도로 목회의 후반부를 정리하고 있는 듯했다. L목사에 따르면 관상기도는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바라봄'의 기도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의 기도라는 설명이다. 가톨릭적인 전통에 따른 기도형태지만 L목사는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분이 무의미했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굳이 가톨릭의 기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L목사는 바쁜 목회 가운데 늘 기도가 부족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기도에 대한 갈증 때문에 참된 기도를 찾다가 관상기도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중보기도가 영적 전쟁과 같다면 관상기도는 영적 안식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전쟁만 할 수 없고 쉼이 필요하듯 기도에도 하나님 안에서 안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는 통성기도를 많이 하는 한국 교회는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위해서는 영혼의 고요함과 깊은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이 L목사의 주장이다.


  L목사는 "한국 기독교가 기도를 통한 안식을 제공하지 못하면 비신자들은 '기독교는 시끄러운 종교'라는 생각만 하게 될 것"이라면서, "기독교회 역사 속의 풍부한 기도 유산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관상기도는 '주시옵소서'의 기도가 아니라 '버림의 기도', '포기하는 기도'라는 것이 L목사의 설명이다. 그는 "결코 구해서 얻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포기할 때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크리스천들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 자체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L목사의 관상기도 예찬에서).


  2) LHJ 목사의 경우

  LHJ 목사가 새롭게 제안하는 기도법은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다. 묵상기도는 '말이 끊어진 기도'인 반면, 관상기도는 '말과 생각이 모두 끊어진 기도'다. 그는 이들 기도법이 가지고 있는 '침묵'의 요소에 주목하며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LHJ 목사에 의하면 기도의 효과는 말로 하는 기도(통성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의 순이다. 말로 하는 기도가 우물물을 길어 밭에 부어주는 거라면, 묵상기도는 밭에 도랑을 내어 물이 흐르게 하는 것이며, 관상기도는 아예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 하는 것이라고 구분해 강조한다. 이목사에게 기도의 효과를 단순히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기도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았느냐이다. 그는 관상기도를 통해 말과 생각, 의지까지 다 소멸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뜻에 더욱 부합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3) K 교수(한신대)의 경우       

  관상기도를 묵상기도, 침묵기도, 혹은 명상기도라고 말하면서도 아빌라의 테레사의 정의를 빌어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란 말은 '하나님 안에서 쉼'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주님과의 일치(communion, 친교, 합일)를 지향한다고 한다. 그는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먼저 유진 피터슨(관상적 목회자)을 인용하면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에 근거해 책망한다. 또한 시편을 제시하는데, 시편에는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시 46:10에서 '가만히 있어'의 영어 포현은 'be silent'로서 침묵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엘리야의 경우를 예시하기도 한다.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왕상 19:1-18)는 내용도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성경적 증거본문으로 제시한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고 한다. 요 14:10, 14:20, 17:21,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자가 마음을 비워 그 속에 주님을 모시고 그 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롬 8:26-28은 관상기도를 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26절)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신다는 구절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서 조용히 침묵 가운데 마음을 비워드리는 일인 것이라고 하며 이것이 곧 관상기도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계 3:20을 예로 든다.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3. 관상기도에 대한 비판


  1) 다양한 비판

  수년 전부터 관상기도에 날을 세우고 비판을 가하고 있는 L목사에 의하면 관상기도는 '신비주의 자아 최면 형상'이다. 이것은 이교도 명상 도입에 기독교형의 탈을 쓴 비성경적 방법이며, 복음과 상관없는 것이며, 선불교 요소가 첨가된 것이다. 한국 개신 교회에 관상기도를 도입하기 위해 G교회 목사 부부가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부터 미국의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적 수도원에 들락날락하며 관상기도수련을 받았던 점과 그들의 영성을 멘토하였던 영성가들이 과연 누구인 지를 발견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라고 한다(관상기도는 진리의 사각지대, 관상기도를 즐기는 님들에게, 김삼 목사 저).


  G교회 목사 부부를 영적으로 지도한 문제의 살렘 인스티튜트는 종파를 막론하고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관상영성을 보급해온 단체다. 표면상 그럴듯한 기독교 단체 같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종파'만이 아닌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초월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관상기도가 동양적 신비주의 사상과 가톨릭 신비주의를 물려받은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미국 튤립신학교의 K교수도 관상기도에 대하여 꾸준히 비판의 글을 올리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항상 이상한 교리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퍼진다고 한다. 요즘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리스 근처 아주사 대학의 리차드 포스터 목사를 비롯한 많은 목사들이 정통기독교와는 다른 소위 명상영성 운동을 권장하고 있어서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고 전 세계에 다니면서 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빗나간 영성운동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


  관상기도가 미국판 선불교라는 관점도 있다. 미국을 움직이는 힐러리 클린턴이나 오프라 윈프라 같은 미국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이 존경하는 크리스천이 토마스 머튼 신부인데, 머튼 신부는 가톨릭의 트라피스트 수도회 출신의 수도사로서 영성신학으로 유명하며 수도자들의 세속적 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신부이다. 이 신부는 기존의 복잡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문자적 교리보다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그 마음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보는 성화를 주장한 신부이다. 이러한 머튼 신부의 힘과 지혜의 원천은 무엇일까? 이것은 그가 평소에 친구로 지낸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 스님에게도 있지만 가장 절친한 마음의 친구였던 일본의 스즈끼 선사가 아닐까 한다. 스즈끼 선사는 일본선의 대가로서 대승기신론을 세계 처음으로 번역하여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 알린 사람이다. 이러한 선사의 영향에 의하여 머튼 신부는 불교를 알고 선불교를 알게 되었으며 이를 기독교에 응용하여 영성신학을 만들고 관상기도를 개발하였다고 본다.    

  2) K교수에 대한 L목사의 비판

  앞서 언급한 K교수의 이 같은 성경인용에 대하여 합신 교단의 L목사가 그 성경인용의 타당성 여부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관상기도 추종자들이 내세운 대표적 성경구절들의 인용이 관상기도를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먼저 이사야 30:15의 제시에 대하여서는 관상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용히 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 받았다는 내용을 본문이 전후 문맥에서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사람이 노력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한 전초적인 뜻을 밝히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관상가들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영감성과 계시를 모르고 구속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황당무계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시편 46:10의 제시에 대해서도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안식하라는 것이지 기도로 조용히 관상하라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설령 기도하라는 말이 나오면서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관상하라고 한다 할지라도 역시 성경의 전후 문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하며 본문은 구원과 관계된 것이지 관상기도와 연결된 흔적이 없다고 한다.


  왕상 19:1-18의 제시에 대해서도 본문을 문맥 속에서 살펴본 뜻은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의미라고 한다. 외부적으로 요란한 물리 현상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인데, '세미한'이란 말은 물리적인 외부의 것들이 조용하다는 것이지 엘리야가 조용히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마 5:3의 제시에 대해서도 분문의 빈 마음이라는 것은 탐욕, 정욕, 물욕 등의 생각을 갖지 않고 정결한 심령으로 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며,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임을 겸손히 선언하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구하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겸비한 모습으로 성령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행 2:28)고 한다.      


  요 14:10, 20, 17:21의 제시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동거동행으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오히려 요 14:10과 14:20은 14장 전체의 문맥 가운데서 살펴 볼 때, 결국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롬 8:26-28의 제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탄식함은 죄 때문에 죄로 얼룩진 인간들을 안타까워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구촌의 상태를 탄식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삽입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황당한 말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초적 상태를 향하여 나가시는 것이며, 최종적인 목표를 향하여 가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성령의 독자적 영역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인위적인 관상행위가 들어가겠다는 것은 인본주의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계 3:20의 제시에 대해서도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침묵'이라는 언어는 필요 없는 말이라고 한다. 주님이 연합의 방식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주님과의 연합의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관상가들의 자의적 해석이다.


  결국 지금까지 관상기도 주창자의 성경인용과 다른 곳에서의 실체적 행위를 볼 때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침묵하여 마음의 입술로 깊고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면 좋겠지만 관상기도의 실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에서 파생된 새로운 양태의 이방 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도 형태라는 것이다. 침묵만 하려 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어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의, 뉴에이지로서 장차 종교다원주의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가 보기에는 관상가들이 좋은 말 사이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넣고 있다. 이처럼 말씀 사이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미혹이요 함정이 아닐 수 없다.


 4. 관상기도의 현상과 의미와 배경


  1) 현상.

   a. 관상기도는 신사도들에 의해서도 매우 증진되고 있다.

   예를 들어 타드 벤틀리의 이전 홈페이지에는 관상기도를 통해서 삼층천을 보는 방법에 대한 관상법 강의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 자신이 관상기도 중에 영계에서 선다 싱을 만났다고 적었으며, 선다 싱은 요새 종교분야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인 스웨덴버거를 영계에서 만났다고 알려져 있다.


   b. 관상기도는 신복음주의권에서도 매우 유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레노바레의 리차드 포스터와 The Message를 쓴 유진 피터슨을 꼽을 수 있다.

  

  2) 의미

  그리스어로 관상은 '하나님을 보다'라는 어원을 가진다고 한다. 이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관상기도는 직관의 기도라 할 수 있으며,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이세영, 이창영, 향심기도 수련). 키팅 신부는 "관상이란 내적 병형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대화이자 우리가 동의만 한다면 신성한 일치로 이끌어주시는 대화"라고 하였으며, "생각과 말과 감정을 초월하시는 궁극적인 신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 즉 존재 전체를 개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우리 안에 계시며 호흡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선택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의식 자체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고 믿는 하나님께 우리의 의식을 개방한다"고 한다. 관상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공부가 아니라 수련이며,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한다. 체험과 깨달음은 수련을 통해서 얻어지며, 수련 없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한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Y교수도 관상기도에 대하여 긍정적인 데, 관상적 태도란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투사하지 않고 그 사람 자체 그 사물 자체로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고 한다(유해룡, 기도체험과 영적 지도). 이러한 관상적 태도를 기르기 위해서는 "자기 초월을 통하여 대상 앞으로 나를 넣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Y교수는 관상적 기도를 개방과 참여라는 말로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며 기도를 기도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하는 데 폐쇄적 자세와 개방적 자세가 그것들이다. 전자의 경우, 기도자로부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열려 있는 데,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자에게로 오는 길은 닫혀 있는 데 비해 후자의 경우는 기도자와 하나님 사이에 쌍방 간에 길이 서로 열려 있다고 한다.


  관상적 기도의 또 다른 특징을 기도자가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고 말하면서 능동적 관상과 수동적 관상으로 나누어 말한다. 전자의 경우는 관상적 경험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기도자가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관상적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며, 후자의 경우는 주님께서 임의적으로 우리를 그 분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건인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전적인 은총으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일치의 상태라고 한다.


  3) 배경

  동양적 신비주의 사상과 가톨릭 신비주의를 물려받은 것 중의 하나가 현대 관상기도/향심기도이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관상기도의 선배로는 토마스 키틸, 토마스 머튼, 헬리 나우웬, 노르위치의 줄리안, 십자가의 요한, 아빌라의 테레사가 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에서 "토마스 머튼이 선불교, 수피즘,  도교, 힌두교의 영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동양 명상의 여러 형태들이 크리스천들 속으로 섞여 들어왔다"고 적고 있다. 관상영성이 복음주의 교회로 들어오게 된 것은 70년대 세 명의 수사들(토마스 키팅, 윌리엄 매닝어, 버절 페닝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종교통합적인 가톨릭 신학자들, 일주일간 불교명상 피정을 제공한 동양 선의 대가인 조슈 사사키, 초월명상을 가르친 트라피스트, 수사였던 폴 메리첼 등을 수도원으로 초청했다. 가톨릭 수사들과 동양명상가들의 대화를 통해 가톨릭 관상기도는 평신도를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이 손쉽게 훈련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 또는 "듣는 기도"라고도 불리는 관상기도는 "1970년대 초 미국의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영성에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가톨릭 전통의 관상기도를 대중화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이세영, 이창영, 향심기도)고 하는데, 로마 가톨릭 수사들인 토마스 머튼, 토마스 키팅, 버질 페닝턴 뿐만 아니라 퀘이커인 리처드 포스터 등에 의해 가르쳐지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으며, 향심기도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로 가는 지름길인 동시에 우리를 관상기도로 이끄는 첫 단계"라고 한다. 이 기도 방법은 하나의 권위가 없고 단일화된 가르침도 없다. 대부분의 스승들이 중세 신비주의, 힌두교, 불교의 영성 교사들을 인용한다.


  "향심기도는 크리스천 관상기도의 유산인 고대의 기도 수행으로부터 유래되었다. 특히 사막의 교부/수녀들,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무지의 구름,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고 아빌라의 성 테레사로부터 유래되었다. 이것은 1970년대에 메서추세츠 스펜서의 성 요셉 수도원에서 세 명의 트래피스트 수사들(윌리엄 메닝어, 버질 페닝턴, 토마스 키팅)에 의해 간단한 기도 방법으로 증류되었다"고 한다. 덧불일 것은 "키팅이 수도원장이었던 20년 동안(1961-1981) 이 수도원은 불교와 힌두교 대표자들과도 수시로 대화를 나눴고, 한 선승이 수사들에게 1주 수련회를 이끌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전 트래피스트 수사였던 초월명상 교사도 수사들을 가르쳤다".


  관상기도에 대한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은 명백하다. '이탈, 변이, 비움, 계발, 그리고 각성' 같은 단어들이 관련 도서의 바다에 들락날락거린다. 비록 관상기도가 크리스천 훈련으로 제시된다고 해도 이런 용어들의 사용은 무엇이 가르쳐지는 지 보다 면밀한 검색을 확실히 요구하고 있다.


  맺음 말


  지금까지 통용되던 기도 분위기에 대하여 새로운 기도방식에 대한 요구는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부르짖는 기도만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도 좋은 기도일 수 있다. 하지만 겉모양이 같다고 해서 속도 같은 것은 아니다. 겉모양은 같더라도 속의 정신과 내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기도방식을 도입할 때에 배경을 살펴서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특히 관상기도와 관련해서는 로마가톨릭적인 배경 뿐 아니라, 이교적이고 혼합종교적인 배경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렇게 그 배경이 확인된 이상 앞으로 더 이상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지 말고 성경적인 가르침과 전통 안에 머무르는 것이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굳이 그런 위험성이 있는 관상기도가 아니더라도 성경의 교훈을 살펴 고요히 묵상하며 주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를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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