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성경관 '실존주의 아류' - 신정통주의
애매한 성경관 ‘실존주의 아류’ - 신정통주의
- 김기홍 목사
신정통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빛나는 인간 이성은 모든 것이 잘 되게 할 것이다. 과학은 세상을 이상향으로 만들 것이다’ 이런 식의 교만한 생각은 세계 대전을 통해 무너진다. 인간의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죄성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자유주의는 와해될 위기에 도달했다. 인간은 아무리 해보아도 인간이었다. 어찌 하나님이 될 수 있으랴!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 역시 전통적 신앙의 진리성을 신학자들은 깨닫는다. 종교개혁은 출발점이 성경이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유주의 이후였다. 성경을 문자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인간적이고 오류 많은 문서 아닌가. 그러므로 더 이상 성경보다는 말씀 위에 기독교를 세워야 한다. 말씀은 성경이 아니고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 위에 신학을 세우자. 그래서 신정통이 시작된다.
◆ 애매한 성경관
정통 신앙은 역사적인 계시에서 출발한다. 그 역사적 계시는 무오한 성경에 쓰여있다. 하나님이 무오하게 하셨다. 그러나 신정통은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의 성경비평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계시는 무오한데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성경은 안 그런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인 진리와 종교적인 진리를 구분하기로 했다. 신학자들간에 그렇게 치열한 종교와 과학간의 갈등이 신정통주의자들에게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다. 과학적인 것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종교적인 것은 종교적인 방법으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처음 다섯 장이 과학적인 역사인가? 자유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신자들에게는 당연히 역사적 사실이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였다. 그것은 증명되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믿는 종교적 사실이었다.
그러면 과학적 사실과 종교적 사실은 어떻게 연관을 시켜야 하는가? 변증법적으로 한다. 마치 줄타기 선수처럼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 두 쪽을 다 쥐고 앞으로만 달려야 한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신앙이다. 자유주의와 전통신앙을 다 쥐고 뛰어야 한다.
말씀 곧 그리스도 위에 신학을 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한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 성서비평을 통해 찾아낸 그리스도를 한 손에 쥐고 다시 전통적 신학을 다른 손에 쥐고 그래서 나온 결단 위에 자신의 신앙을 세운다는 말이다. 이처럼 신앙은 역설적인 것이었다.
◆ 실존주의 바탕
이러한 계시관은 실존주의에서부터 도움을 얻는다. 전에는 역사면 역사고 아니면 아니었다. 계시면 계시고 아니면 아니었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과학적으로 역사가 아니라도 내가 주관적으로 역사로 믿으면 역사였다. 계시 역시 주관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요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 실존주의이다. 처녀가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것은 1 세기 사람들의 주관적 체험이요 그것을 현대에 맞도록 해석하는 것은 현대 사람들의 주관적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성경 내용을 양식비평의 방법대로 받아도 상관이 없었다.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까? 그리고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까?” 신정통주의자는 단연코 “예 믿습니다”고 말한다. 그럴 때 어떤 의미에서 믿는지를 물어보아야만 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사실로 믿기 때문이다. 주관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신문기자가 바르트에게 물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믿습니까?” 대답은 “예”였다. “그러면 부활하는 장면이 사진을 찍어도 나옵니까?” 그는 한심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왜 거기 나오겠습니까?” 과학이나 실제 역사에서는 전혀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초역사” 또는 “구속사”란 단어가 나온다. 더 큰 의미의 역사라는 말이다. 일반적인 보통 역사가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보이는 역사이다. 더 큰 의미의 역사는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다. 실존주의의 도움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주관적 역사이다.
◆ 가장 무서운 적
유럽과 미국의 신학교수들은 거의 모두 신정통주의의 입장을 따랐다. 바로 그 전에 자유주의 신앙을 따랐던 것과 같았다. 신정통으로 불신앙의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동시에 무지한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른 지성인다운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앙은 분명해야 한다. 자연과학을 넘어서고 이성의 한계를 넘어섰지만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니까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으면 그 믿음의 효과를 누리고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확신이 넘쳐서 전하는 것이 정통신앙이다.
하지만 신정통은 너무도 애매하고 모호하였다. 자유주의와 똑같은 방법으로 비평을 통해서 성경을 본다. 성경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마음으로는 부정하지만 그대로 설교하지 않는다. 실존적으로 그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느낀 것이었으니까.
신정통으로 신학훈련을 받은 목사들은 지옥과 천당을 말하지 않았다. 부활을 말하지만 사실상 마음에서 부활했다고 믿으면서 외쳤다. 동정녀탄생이나 기적도 다 마찬가지이다. 절대로 실제의 삶으로 말하지 않았다.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풀어나갔다.
성경의 내용은 너무도 모호하게 설명되었다. 과학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과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교적 진리가 무슨 힘을 쓰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분명한 과학의 세상으로 모두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로 서구교회는 온통 텅 빈 건물만 남고 말았다.
과연 신정통이 정통주의의 편인가? 현대인에게 정통신앙을 심어주었는가? 어떤 사람은 신정통주의란 잘못된 단어이고 실제는 신자유주의라고 말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차라리 적군 복장을 하고 있다면 싸울텐데 예비군복을 입고 나오면 아군인줄 착각한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보다 더 큰 피해를 주었음이 판명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