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신앙의 기반이요 울타리다 (김성주 목사)
신학은 신앙의 기반이요 울타리다
< 김성주 목사, 서울언약교회 >
“신앙의 본질은 세속적 삶의 질 높이는 방편과 수단일 수 없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리라”(롬 10:17)는 본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신학(교리)은 신앙의 울타리요 기반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정당한 신학과 교리의 뒷받침이 없는 신앙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 인해 자칫 무속적이며 기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성이 크다. 이는 본질에서 우상 숭배적 신앙에 다름 아니라고 성경은 경고한다(롬 1:21-23).
나아가 신앙은 전인적 삶이다. 믿음의 열매로서 실천적 삶이 구체적으로 수반되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서 죽은 신앙이라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약 2:17, 22, 26). 다시 말� 생활과 유리된 신앙은 위선이며 가식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명제는 삶의 전 영역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적극적인 통치를 받는데서 비로소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교리는 신앙의 울타리며 기반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적 제반 규범들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상대적으로 극단의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되고 있다. 힘과 세를 앞세워 절대다수가 추구하는 것이 진리며 정의라는 포퓰리즘적 사고가 곳곳에 만연돼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대중주의에 발맞춰 옳고 그름의 절대가치보다는 좋고 나쁨의 상대가치를 추종하는 집단적 행동양식이 이 시대의 보편적 가치체계로 대두되고 있다.
이런 식의 행동원리는 비단 신앙의 영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구현과 경외 및 절대순종이라는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신앙의 본질(전 12:13; 고전 10:31)이 삶의 다양성과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단지 개인의 세속적 삶의 질을 높이는 하나의 방편과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처럼 본말(本末)이 전도된 상황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창조자로서 절대자와 구원자일 수 없다. 단지 인간의 현세적 행복과 유익과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일개 수종자로 인식될 뿐이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 요정처럼 사람에 의한(by the people), 사람을 위한(for the people), 사람의 하나님(of the people)으로서 말이다.
하나님은 램프 요정일 수 없어
진리성의 특징은 시공을 초월해 보편타당성에서 찾아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 더 이상 절대가치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다. 가장된 진리일 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 주권적이며 비공유적인 속성상, 그 분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오직 유일한 진리 곧 신앙과 삶의 최고의 규범으로 작용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에 말이다.
따라서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오직 ‘성경이 말씀하는바’(What the Bible says) 총체적인 계시관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의 천상적 정체성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적극적인 순종력의 발휘가 전제되는 데서 구원을 누리는 삶의 실질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일이 비로소 확증되기 때문이다.
현대교회 성도들이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현 시대를 살아가면서 성경적 가치관의 회복과 구체적인 적용의 필요성을 새삼 강조해야 할 정당한 명분과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성경적 가치관 회복에 적극 힘써야
우리는 다시 한번 종교 개혁자들의 우정 어린 경고인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슬로건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개혁이 수반되지 않을 때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 감춰진 죄성으로 인해 교회와 신앙은 필연적으로 다시 변질되고 타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역사 속에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불순종 사건에 이은 가인의 아벨 살인사건과, 홍수심판 후 번성한 인류에 의한 바벨탑 축조사건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시해 준다.
물론 여기서 개혁의 의미는 방편적 측면에서 부분적인 제도적 개선과 수정 및 보완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까지 제도권 속에서 절대 다수의 비호아래 향유해 왔던 일체의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하면서라도 성경이 말씀하는바 본질에로 과감히 전환을 시도하는 용기 있는 결단을 가리킨다.
이처럼 전향(轉向)적인 개혁의 필요성과 관련해 성경은 양자택일의 방식을 촉구한다. 진리와 비진리가 결코 공존할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 바알 편에 설 것인가”(왕상 18:21; 수 24:15), “하나님을 좋게 할 것인가 / 사람을 좋게 할 것인가”(갈 1:10),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인가 / 사람의 일을 생각할 것인가”(마 16:23)라고 말이다.
진리와 비진리 공존할 수 없어
본질상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결코 조화될 수 없다”(고후 6:15). 공존하거나 연합될 수 없다.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목적하는 바의 뜻이 다르고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교류와 교제의 여지마저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공동의 관심사가 있고 무엇보다 다양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기에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리 안에서 신앙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유유상종할 필요성을 갖는다. 바르고 성숙된 교회란 성경이 자증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됨”(엡 4:13)을 부단히 추구해 나가는 교회를 일컫기 때문이다. 이 일에 성경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과 준거로 작용한다.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서 있기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절)는 말씀을 새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출처 : 기독교개혁신보 (http://rpress.or.kr/xe/52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