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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성인경)

안산 회복 2012. 7. 23. 22:39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 성인경(L'Abri Fellowship) -

 

 

남산을 올라가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무심코 내뱉은 말입니다. “역시 남산은 서울의 허파야. 남산이 없다면 숨쉬기도 힘들 거야. 서울의 더러운 공기를 맑게 정화시켜 주거든.” 그 때 할아버지 손을 붙잡고 올라가던 손자 녀석의 맞장구입니다. “할아버지, 남산이 다시 옷을 갈아입었어요. 일 년에 네 번씩이나요. 나는 가을 옷을 제일 좋아해요.” 똑 같은 남산을 할아버지와 손자가 왜 이렇게 다르게 볼까요? 나이 탓일까요? 아닙니다. 두 사람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계관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세계관의 미신들

 

먼저 세계관에 대한 미신부터 좇아버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미신이 없는 시대는 없는가 봅니다. 오늘날과 같은 최첨단 과학 문명시대에도 시험장에 들어갈 때 옷자락에 부적을 붙이고 들어가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작년에 합격한 학생들의 속옷을 구해 입고 들어가는 학생들도 있고 거기에 편승하여 ‘입시 팬티’라는 것도 나왔을 정도니까요. 울릉도 호박엿처럼 찰싹 붙으라고 교문에 엿을 더덕더덕 붙이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맹꽁이서당’ 학생들의 세계관에 대한 일반적인 미신은 이런 것들입니다. 1)남산 밑에서 장난꾸러기로 소문난 길동이의 미신입니다. “‘세 개의 관’이라니? 요즘 같은 감각시대에 웬 골치아픈 끔찍한 소리냐?”며 하품부터 늘어지게 합니다. 2)언제나 똑 부러진 소리만 하는 똑순이는 “먹고살기도 바쁜데 세계관이 무슨 필요가 있냐?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곤 줄 몰라?”라고 제법 똑똑한 채 합니다. 3)친구들 꽁무니만 따라다녀도 하루가 바쁜 돌쇠는 “맞아, 세계관이란 배운 놈들의 말장난이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의 일상과는 아무짝도 상관없는 것이야”라며 맞장구를 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오해요 천박한 미신입니다. 길동이처럼 ‘세계관(世界觀)’이란 한자말에 겁부터 먹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쉬운 말입니다. 그리고 맹꽁이처럼 배부른 사람들의 지적 유희라고 비아냥거릴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배부르고 할 일이 없어서 이런 소리를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마당쇠처럼 세계관은 신앙과 일상생활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비웃으면 안됩니다. 사실은 그 반대이거든요. 그것은 모두 오해요 미신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 청년들이 빠져있는 세계관적 미신은 어떤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가장 명쾌한 분석은, 내가 쓴 [나의 세계관 뒤집기]를 읽고 김종철이 쓴 ‘서평’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서평은 요즘 대학생 청년들이 세계관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문제가 무엇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1)세계관은 어렵다. 우리 나라에 소개된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번역된 것인데다, 쓰이는 용어 또한 익숙하지 않은 것이어서 난해하다... 2)세계관 논의는 이제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다. 80년대 부흥했던 세계관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시들해져서 이제는 한물간 이야기로 여겨지는 듯하다... 3)세계관 공부는 실제적인 삶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90년대 들어와 나타나는 세계관 논의에 대한 회의는 앞에서 지적한 사회적인 변화 뿐 아니라, 세계관 공부가 머리만 차갑게 하고 삶의 열매가 없었다는 인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정확한 분석입니다. 나는 세계관에 대한 이런 모든 오해를 “미신(迷信)”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미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시적인 심리안정과 이성적 마비증세와 막연한 신비주의에 빠지게 하듯이, 세계관에 대해서 미신을 가질 경우에도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청년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지적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기 도취와 만족에 빠지거나 혹은 막연히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흠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신에서 벗어나라

 

잘못된 생각과 오해와 미신에서 벗어나는 것이 세계관 공부의 첫걸음입니다. 특히 미신에 붙잡혀 있으면서 세계관 공부를 해봤자 기독교 세계관을 ‘지적 유희’ 정도로 여길 것이 뻔하며 마지막에 남는 것이라고는 허탈감밖에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 세계관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먼저 부탁합니다.

 

첫째, 세계관은 인격적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길동이가 오해했던 것처럼, 세계관은 성경적 사상과 전혀 다른 무슨 엉뚱한 것이거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난해하거나 철학적인 사변을 늘어놓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진리는 평범한데 있으며 단순하고 분명한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워서 떡 먹듯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라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요한복음 8:32)는 말씀처럼, 인격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의 ‘아는 것’은 전 인격적인 앎인데 진리를 가슴에 사무치도록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루디아가 복음을 듣고 마음이 열려서 인생의 참 주인을 만난 감격과 같은 것이며,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몸이 뜨는 것을 보고 ‘부력’이라는 자연법칙을 발견하고는 “휴레카(찾았다, 이거다)”라고 함성을 질렀던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진리는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를 듣고 차근차근 배우는 중에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모든 꼬였던 문제들이 술술 풀리는 전 인격적인 변화의 경험을 갖게 됩니다. 그러기에 세계관 공부를 할 때는 먼저 진리의 영이 바른 도를 깨닫게 해 주시고 모든 지적 혼돈과 도덕적 방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도록 구도자의 마음과 기도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세계관 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기다리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성취되었습니다. 나라 살림도 굶지 않을 정도로 펴졌습니다. 그렇다고 세계관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민주화 투쟁이나 경제 회복과는 전혀 새로운 양상의 영적 전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니 ‘제3의 길’이니 세계화니 하는 정치경제 체제논의도 계속되고 있고, 동성애와 몸철학 등의 쾌락주의뿐만 아니라 다원주의, 탈 현대주의, 신비주의 등 새로운 종류의 이데올로기들이 캠퍼스에서부터 시장바닥까지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 전쟁은 악한 사상이 하나라도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이상 계속되어야 합니다. 맹꽁이처럼 세계관을 사치품이나 액세서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영적 전쟁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세계관이 영적 전쟁의 필수 장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가오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박해와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적 위협을 내다보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prepare your minds for action)”(베드로전서 1:13)고 부탁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 전쟁을 위해 기독교 지성으로 무장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영적 전쟁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세계관은 인간의 삶과 역사에 반드시 영향을 미칩니다.

세계관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과 역사에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과 학문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마당쇠처럼 세계관을 공부하더라도 실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른 세계관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동기부여가 안되었거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세계관을 배우지 않았거나 혹은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깊이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어릴 때 들려주신 한 마디, 예를 들어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하느니라”는 말씀이 내 평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압니다. 성적인 유혹을 받을 때, 주식을 사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싶을 때, 지역감정이 살아날 때 바로 그 말씀이 힘이 됩니다. 어른들의 그 한 마디가 나의 세계관이 되었고 지금도 그것은 인생의 지렛대가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말씀을 종종 잊어버리고 산다는데 있습니다.

 

 

세계관이란 무엇일까?

 

첫째, 세계관은 안경과 같은 것입니다.

안경의 색깔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듯이, ‘세계관’이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세상과 사물을 보는 관점이며 그것은 안경과 같은 것입니다. 같은 남산이지만 앞의 할아버지와 손자는 자기들이 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안경’이라고 하는 세계관에 따라 남산을 다르게 본 것입니다. 즉 할아버지는 남산을 환경적인 시각으로 바로 보았다면 손자는 같은 남산을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세계를 보는 안경, 그것이 세계관입니다.

 

역사적으로 독일의 철학자 칸트(Emmanuel Kant, 1724-1804, 독일의 철학자)가 ‘세계(welt)’ 와 ‘관점(anschauung)’이란 말을 합성하여 ‘세계관(weltanschauung)’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관’이란 말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총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유산계급 세계관’, ‘무산계급 세계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독일어를 한자말로 번역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보다 쉽고 의미가 통하는 좋은 우리말을 찾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관’이란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그리고 나이가 든 사람이든 나이가 어린 사람이든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고 판단하는 관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이란 학문 수준이나 연령 차이에 상관없이 그리고 신앙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세상을 보는 관점입니다. 즉 많이 배우고 똑똑하기 때문에 세계관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이 들어야 세계관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종교를 가져야 세계관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세계관은 홍역과 같습니다.

요즘같이 독감이 기승이 부리는 때에 우리 스스로가 독감을 예방할 재주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온갖 바이러스가 득실 거라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유행성 독감에 걸리는 수가 많습니다. 걸린 후에야 알아차리게 된다는 점에서는 홍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세계관’이란 보이지 않는 독감이나 홍역 바이러스처럼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전염되는 것이며 그것을 ‘전제(presupposition)’라고 합니다.

 

‘전제'는 일반적으로 다음 단계의 판단으로 나아가기 전에 갖고 있는 선입관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람에 따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끔 자기 나름의 세상을 보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전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쉐퍼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홍역에 걸리듯이 주위의 가족과 사회로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게 된다.”

 

그러나 경험이 많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가끔 홍역과 독감을 미리 예방하기도 하듯이 전제를 조심스럽게 선택하기도 합니다. 즉 ‘세계관’이란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쉐퍼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보다 지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전제가 어떤 세계관인가를 주의 깊게 생각한 후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쉐퍼는 사람마다 갖고 있는 ‘전제’와 ‘세계관’을 동일시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세계관을 가지게 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하는 세계관이 어떤 성질의 것이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를 심사숙고한 후에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사람마다 갖고 있는 전제가 세계관입니다.

 

셋째, 세계관은 자(朿)나 저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나 저울이 없어도 대충 키가 얼마며 몸무게가 얼마나 나갈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측기구인 자나 저울이 없으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계관’이란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자와 저울과 같은 것인데 자신과 자신의 바깥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재어보고 달아보는 일련의 ‘지적인 사고 체계’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이란 한 개인이 세계에 대해 갖는 종합적인 ‘신념 체계’이며, 자나 저울과 같이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체계적이고 종합적이며 논리적인 대답을 가진다는 의미에서는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도 “철학에서 도피할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은 철학을 부인하면서도 스스로는 무의식적으로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사고 체계와 신념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삼척동자까지도 ‘아마추어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철학과 동일시하는 것도 가능하며 철학이 곧 세계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관’이란 엄밀한 논리 체계를 갖추고 인간과 우주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던 전통적인 철학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세계관은 전래의 철학 하는 정신을 존중하면서도 괴변이나 즐기는 탁상공론(卓上空論)이나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철학보다는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답을 찾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므로, 굳이 세계관을 철학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앎과 삶의 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그러면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세계관’이란 말이나 ‘전제’, ‘사고 체계’ 혹은 ‘기독교 철학’이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쓰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은 많이 있으며 앞으로 차차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도 최고의 세계관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로마서]의 한 구절, 즉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첫째,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 통찰력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영적 통찰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분별한다”는 말은 주님의 뜻이 좋은지 나쁜지 ‘시험한다’는 말이 아니라 ‘알게된다’, ‘발견한다’, ‘찾는다’, ‘배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과 관점을 분별하는 능력이 세계관이며 그것은 마치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는 통찰력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빌립보서 2:5, 고린도전서 2:16) 여기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예수님의 느낌이나 감정 혹은 정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minds)이며, 예수님의 전제(presupposition)이며, 예수님의 사고체계(thought system)이며, 예수님의 철학(philosophy)을 말합니다. 그 밖에도 “네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누가복음 10:27)는 것도 우리의 변화된 생각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오직 네 마음의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의 “마음”이란 말은 ‘지성(mind)’을 의미하는데, 영혼과 몸을 산 제사로 드린 사람은(로마서3:20-12:1) 이제 생각과 지성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물을 판단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변화 받은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쫓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여기에서 ‘기독교 세계관’이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의해 이미 결정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독교 세계관은 시대 정신을 비판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사상의 전시장입니다. 그런데 사상의 전시장에는 인본주의니 막스주의니 실존주의니 탈현대주의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장사상’이니 ‘몸철학’이니 ‘사오정’이니 하는 괴담론들이 판을 치고 있으며 누구나 이런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사상의 변천 과정과 옳고 그름을 일일이 다 따져보지 않더라도 시대정신의 속성은, 바클레이(William Barclay)가 절 지적한 것처럼, “주위환경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과 같이 변화무쌍합니다.

 

비판력이 필요한 이유는 “이 세대(this age)”의 특징에도 있습니다. 여기의 “이 세대”는 지리적인 의미의 ‘세상’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가치관적인 ‘시대’를 말하는 것인데 이 문맥에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를 말합니다. 특히 “이 세대”는 영원하지 않으며 “올 세대(the age to come)” 혹은 “하나님의 뜻”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신론적이고 불신앙적이며 비성경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마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1)“영과 몸”을 산 제사로 드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며, 2)시대정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기 때문입니다.(비교: 고린도후서 10:5) 예수 믿지 않는다면 몰라도 예수를 믿고도 계속 시대정신대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독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의 영혼에 바벨론 머리를 달고 다니는 것과 같으며, 삼성컴퓨터 하드웨어에 MS 소프트웨어가 깔려 있는 것과 같은 이원론적인 삶입니다. 우리 시대의 유행하는 시대정신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혹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시대정신과 거꾸로 사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셋째, 기독교 세계관은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삶의 가치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은 한 순간에 끝납니다. 그리고 그 단 한 번의 믿음은 영원한 효력을 가집니다. 그러나 삶의 체계와 가치관의 변화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작업으로만 가능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도 단 번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을 입는 것은 단 번에 되지 않습니다. 새 옷을 한 번만 입고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입는 것과 같이 세계관은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에베소서4:23-24)

 

비록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린다 하더라도 사고의 변화는 평생에 걸친 영적 변화의 핵심적인 목표 중에 하나이어야 합니다. 머레이가 그것을 잘 지적했습니다. “성화(그리스도인의 삶)는 인간의 의식의 중심, 즉 사고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혁명적인 변화의 과정이다.” 성경적 세계관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그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초한 ‘계시의존적 사고방식(啓示依存的 思考方式)’을 가지려고 꾸준히 노력할 때 가능합니다. 성경이 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비록 시간이 걸리고 서서히 바뀌기는 하지만 결국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맹꽁이 서당’ 학생들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일 태양이 다시 떠오를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언제나 아는 것보다 말이 많은 맹꽁이는 “그건 너무 쉬운 문제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태양이 떠오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내일 다시 떠오른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고 용감하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경험론적인 대답입니다.

 

아는 것만큼 평가를 잘 받지 못하는 마당쇠는 “자연공부 시간에 졸았니? ‘지구는 24시간에 한 번씩 자전을 하며 365일마다 태양을 돈다’는 과학적 사실이 중요한 거야. 이 우주는 그런 자연법칙에 의해 질서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일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는 것도 당연한 거야”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것은 관념론적인 대답입니다.

 

두 친구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또순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 둘의 의견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아. 나도 얼마 전까지 너희들과 똑같이 생각했지만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 맹꽁이 너는 얼마나 살았다고 경험을 내세우니? 네가 옛날 노아 할아버지 때 태양이 빛을 잃고 여호수아 할아버지 때는 반나절이나 태양이 하늘에 멈춘 것을 보기나 했니? 그리고 마당쇠 너는 우주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떠드니? 지구가 자전하는 시간은 24시간이지만 태양을 도는 것은 정확하게 365일이 아니라 365.2422, 즉 5시간 48분 46초가 더 있단 말이야. 그래서 윤달이 있는 거야. 그리고 우주에는 질서뿐만 아니라 카오스가 있다는 소리도 못 들어봤니?”

 

그리고는 또순이가 계속했습니다. “나는 너희 둘의 생각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유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언약 사고방식에 숨어있는 태양에 대한 두 가지 비밀 때문이란다. 1)태양은 자기 스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노아와 여호수아 할아버지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라는 것과 2)다시는 홍수로 세상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처럼 ‘땅이 있을 동안에는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태양이 매일 떠오르고 질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신 것이란다. 그래서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

 

우리는 또순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통합적 사고방식’ 혹은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욥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지식 논쟁 장면에서 하나님은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무식한 말로 내 뜻을 흐리게 하는 자가 누구냐? 이제 너는 남자답게 일어나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네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아침이 되라고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한 적이 있느냐?”(욥기 38:1-15, 현대인의 성경) 이 질문은 우리의 모든 경험적이고 관념적인 지식이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서야 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하나가 되지 못할 경우에 내가 무식한 놈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뜻을 흐리게 하는 죄를 짓는 것은 문제입니다. 또순이가 바꿨다면 맹꽁이와 마당쇠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계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태양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보는 눈이 달라지며 세상뿐만 아니라 우주와 인생 전체가 달라집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 같은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과 창공을 나르는 독수리같이 높은 곳에서 하나님처럼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독수리처럼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관점을 성경적 사고방식 혹은 성경적 세계관이라 부르며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실천적인 성경적 세계관입니다.